[묵상]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요한 5,17-30)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20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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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요한 5,17-30)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2021.3.17.)

by honephil 2021. 3. 17.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길을 지나가다 같은 옷을 입고 가는 연인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미소를 지었던 기억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서로 같은 것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서로 각자의 것을 내어놓고 상대의 것들을 담고 살아가는 모습, 자신의 것보다는 상대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두 사람이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그런 마음 때문에 닮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삶 속에 담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과 닮아 갑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십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담아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알아 가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아드님께서도 그대로 당신의 삶 속에 담아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스스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실 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마음속에 아버지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십니다. 그 ‘담음’은 바로 ‘닮음’으로 변합니다. 외모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사랑까지도 닮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예수님의 삶과 희생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요, 예수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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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서 많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아버지와 대등해진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면 아버지처럼 성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와 대등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다섯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다스릴 권한을 착한 종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고을은 분명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서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 곧 구원에 따른 ‘심판’이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원죄로 심판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로 구원받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이란 이렇듯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결혼한 지 6주 만에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70년 뒤에 알게 된 여인이 있습니다. 1940년 스물두 살의 페기는 공군 조종사 빌리를 만났습니다. 둘은 단숨에 사랑에 빠지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공군 중위였던 빌리는 나치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로 발령이 나서 부부는 쓰라린 이별을 합니다.

 

페기와 빌리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고 전쟁 내내 편지 한 통도 받지 못하며 긴 전쟁이 끝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페기는 재혼도 하지 않으며 7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폐기 역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국회의원 톤 베리에게 보낸 편지가 답장이 옵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는데, 빌리는 기록에 따르면 임무 수행 중 실종 상태라고 하고 생사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페기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빌리와 관련된 모든 곳을 수소문하며 진실을 밝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페기의 삼촌이 직접 군에 찾아가 군사기록을 밝히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6개월 뒤 페기와 친척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합니다. 한 프랑스 여성이 얼마 전 이미 복사본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페기와 친척들은 당장 그 여성을 찾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 군의 도움으로 그 여성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빌리는 프랑스 마을의 영웅이었습니다. 1944년 빌리는 적의 폭격을 맞아 방트 마을 인근에 추락하고 있었고 전투기는 화염에 싸여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데 빌리는 그냥 추락한 게 아닙니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조종간을 마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으며 인적이 드문 장소에 추락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빌리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까지 치러주었고 70년 동안 매년 빌리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방트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에 빌리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빌리의 유골은 노르망디 국립묘지로 옮겨졌고, 방트 마을 빌리의 무덤은 영웅을 추모하는 의미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페기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70년 만에 남편을 만난 페기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출처: ‘결혼 6주 만에 사라진 남편’,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이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보고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빌리의 희생으로 방트 마을 수백 명의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심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교회라는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십니다. 교회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다스림을 ‘왕직’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대로 당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기에 교회라는 마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교회를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그대로 행하여 하늘나라에서 여러 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작은 마을이 생기듯, 우리도 사랑하면 마을이 만들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만든 마을이 있고, 마더 데레사가 만든 마을이 있으며, 이태석 신부님이 만든 마을이 있습니다. 모든 마을은 그리스도를 따른 피의 희생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결과물은 이렇게 나의 피로 세워진 사랑의 공동체들입니다.

https://youtu.be/xQ7RL37uov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2021.3.17.)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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