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7-28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동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합니다. 낯선 거리를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먼 길을 떠날 때에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고 힘이 되어 든든합니다. 또한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며 동행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직장에서,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동행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을 뿐 동행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일하지만,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며 목표를 이루려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다르고 사랑의 표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동행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냈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치와 삶을 오랫동안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하는 듯 보였던 제자들의 생각과 가치는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도, 다른 제자들도 자신들의 욕심과 출세만을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를 여러 번 이야기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꿈과 가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걸었지만, 동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하고 싶습니다. 혼자 걷기보다 함께 걷고 싶어 합니다. 특히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 동행을 위하여 자신의 가치와 생각을 강요하기보다 먼저 동행하는 이들의 생각과 꿈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조금씩 천천히 자신의 것을 내어놓으면서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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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고통을 감수할 이유를 찾았을 때 가장 행복한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신 아들 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 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추구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의 두 방향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는 생존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존하게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가는 행복입니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행복의 기준은 ‘생존’에 있습니다. 내가 더 생존하고 나의 유전자를 더 전파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가 죽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자녀 안의 유전자가 자신의 것보다 더 젊고 널리 전파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징기스칸이라고 합니다. 현대인 200명 중의 한 명은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가 씨를 많이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존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모기나 기생충처럼 무리생활을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야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도 되지만, 무리 생활을 해야만 하는 동물들에게 생존본능은 오히려 행복을 앗아갑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떨어져 산 격리 원숭이는 심한 두려움 속에서 자해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저 살려고 하는 요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려고만 하는 욕구는 그에게 무리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두려움과 고통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 원숭이를 만나고 자신도 동료 원숭이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무리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행복을 찾았습니다.
격리 원숭이는 철사로 된 젖 주는 엄마보다 젖은 주지 않지만, 수건으로 감긴 따듯한 엄마를 엄마로 여겼습니다. 무리생활을 할 수 있는 동물들은 무리 생활을 하는 것이 젖을 먹어 생존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옵니다.
두 번째 행복의 단계는 고통을 없애는 것입니다. 생존본능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 욕구를 없애면 행복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깨달아 욕구를 없애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욕구가 고통의 모든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곧 행복일까요?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할까요? 먹고 싶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아 아무런 욕구가 없다고 그 무기력함을 행복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존 욕구를 없앴다면 그다음 욕구가 필요합니다. 바로 사랑의 욕구입니다. 사랑의 욕구는 생존 욕구와 반대됩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본인이 원한다고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욕구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누군가로부터 받는 보이지 않는 실체입니다. 이 사랑의 욕구는 ‘피’를 통해서만 전해집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부모의 사랑 욕구가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면 자녀도 그 욕구를 지니게 됩니다. 참 행복은 이렇게 사랑의 욕구를 전해주기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찾아옵니다. 이 사랑을 수혈해주기 위해 누워야 하는 침대가 십자가입니다.
영화 ‘수상한 그녀’(2013)는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을 아들 하나 키우며 살아온 욕쟁이 오말순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오말순 할머니는 싸움닭입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인 오말순 할머니 때문에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집니다. 손자들은 엄마를 위해서라도 할머니를 요양원 같은 곳에 보내는 게 낫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오말순 할머니는 쓸모없어진 자신을 한탄하며 한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젊어진 것입니다. 처음엔 가족도 걱정이 되었지만, 이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가수의 꿈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보려 합니다. 점점 유명해지고 사랑도 싹틉니다.
그런데 자신이 속한 밴드에 자신의 손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을 위해 긴급히 피가 필요합니다. 손자와 피가 맞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그러나 피가 빠지면 다시 늙게 됩니다.
젊어진 오말순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수혈을 하기로 합니다. 이때 그 젊은 여자가 자기 어머니인 것을 안 아들은 떠나라고 말합니다. 자기 아들은 자기가 알아서 살릴 테니까, 이젠 자신들 위해 희생하지 말고 당신 인생을 살아보라고 합니다.
이제부턴 남이 버린 시레기도 주워 먹지 말고 그 비린내 나는 생선 장사도 하지 말고 자신 때문에 아귀처럼 살지 말고 명 짧은 남편도 얻지 말고 자신처럼 못난 아들도 낳지 말고 제발 가셔서 한 번이라도 당신 인생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때 어머니는 말합니다.
“아니. 난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살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란다. 그래야 내가 네 엄마고 네가 내 자식일 테니까.”
진화론자들이 생존하는 것이나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는 게 제일 행복이라고 주장하든, 불교에서 고통이 없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하든, 우리는 성령을 통한 사랑으로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나의 사랑을 수혈해주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을 고백하기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눈에 보이는 곳마다 달아놓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죽으려고 할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게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고통을 감수할 이유를 찾았을 때 가장 행복할까요? 바로 당신과의 관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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