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 임금은 가장 모범적인 임금이요 훌륭한 성군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습니다. 사무엘기 하권 7장에서 그는 나탄 예언자에게서 자신의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듣게 됩니다. 그 약속을 들은 다윗은 어떠하였을까요?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나 사무엘기 하권 11장에서는 자기 부하의 아내를 탐하고, 그것을 감추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여 결국에는 부하를 죽이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화답송으로 만나는 시편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의 머리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휘자에게. 시편. 다윗. 그가 밧 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에게 왔을 때”(시편 51[50],1-2). 이 시편에서 다윗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합니다. 하느님 자비에 호소합니다. 호소하는 가운데 그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께서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는 그 강한 믿음이 그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다윗 임금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백성을 잘 통치하였거나 하느님께 한결같은 모습으로 충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임금이자 성군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여 그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참으로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잘하는 것보다 부족함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부족함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
<십자가에만 못 박혀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어제는 우리 자신을 죽이는 못 세 개가 ‘기도-단식-자선’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단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왜 그 못 세 개를 꼭 십자가에만 박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당신 자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이유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와 똑같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가 내가 됩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주인공’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죽임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목적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히틀러는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채식주의자였고 운동을 열심히 하였고 동물 애호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에게 못을 박되 십자가가 아닌 나라 위에 박은 것입니다. 그런 삶은 자신을 죽이지 않는 삶보다 더 안 좋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에게 어떤 지인이 최미라 씨가 유방암에 걸려 홀로 죽어가니 방문을 해 주십사고 청했습니다. 수녀님이 호스피스 병동의 간호부장과 함께 자매님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슴에 거즈와 헌 옷을 덕지덕지 붙여서 덮고 누워있는 자매를 발견했습니다. 간호부장이 거즈를 떼려고 하자 곧바로 거친 말을 내뱉었습니다.
“아, × ×, 더럽게 아프네!”
자매님의 가슴은 곪아 문드러져 있었고 구더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욕을 한 것이 미안했는지 자신이 워낙 험하게 살아와 그렇다며 수녀님에게 사과했고 수녀님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돌봐주는 가족이 없느냐고 묻자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자매님은 무서운 아버지와 무력한 어머니 밑에서 7남매 중 맏딸로 자랐습니다. 18세 때 동네 청년과 몰래 연애를 하다 발각되어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 남자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집을 도망쳐 나와 유일하게 그녀를 받아주는 한 술집에서 술을 따르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엔 몸을 파는 여자들을 통해 돈을 버는 포주 일까지 하였습니다.
자매는 그런 자신도 세례를 받아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수녀님은 오히려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세례 준비를 시켰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라고 시켰는데 욕을 세 번 정도 섞으며 간신히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큰 반감을 보였습니다. 아버지라는 말만 나와도 두려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수녀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라고 잘 설득해 주었습니다.
찰고 때 신부님이 주님의 기도를 시켜보자 자매님은 간신히 욕을 섞지 않고 외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마귀를 끊어버립니까?”라는 질문이 나오자 당황했습니다. 그런 준비는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에이, × ×, 뭐라는 거야?”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수녀님은 그건 긍정의 의미라고 신부님을 설득하려 했지만, 신부님은 단호한 대답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자매님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에이 주책없이! 죄송해요. 수녀님.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이나 짜고! 40년을 못 본 가족들이 갑자기 왜 보고 싶은 건지. 에
이, 주책바가지!”
수녀님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자매에게 가족과 만남을 주선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며 40년 동안이나 관계를 끊은 가족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자매는 그동안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 붙이지 못한 것들을 모아놓았는데 라면 상자로 다섯 개나 되었습니다.
수녀님은 수소문 끝에 자매의 형제들을 찾았고 남동생과 여동생 세 명이 자매님을 찾아왔습니다. 형제들 모두 자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마리아 자매는 자신의 집을 팔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고 형제들은 어렵게 산 누나의 재산을 안 받으려 했지만, 마리아 자매는 받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수녀님. 형제들이 나 죽은 다음에 나를 이야기할 때, 집안 망신시키고 죽은 미운 언니, 누나가 될까 봐 너무 두려웠어요. 그래도 내가 살면서 죄만 짓고 살지 않았다는 것,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자 혼자 살 길이 막막해서 술집에서 일했고 포주로 산 건 맞아요. 그래도요, 저 술집에 온 아가씨들은 꼭 어릴 때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엄마처럼 대해 주려고 했었어요. 제가 이 재산 주면서 동생들한테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라고 약속받아냈습니다.”
자매는 형제들을 만난 1주일 뒤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고 형제들은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신들에게 써 놓은 그 많은 편지를 읽으면서 누나이자 언니의 떠남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최미라 씨의 가슴에 생긴 암은 그녀에게 세 개의 못이 되어주었습니다. 더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못이 십자가에 박혀 마리아로 새로 태어나도록 이끈 분은 베드로 수녀님입니다. 암에 걸려 몸이 죽어가도, 그래서 더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그것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과 선교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 못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박는 이유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함입니다. 사제가 미사 때 십자가에 못 박힌 형태로 기도하는 것도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신랑이요 머리가 되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요한은 묵시록에서 하늘나라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묵시 20,4)을 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은총의 세 못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되어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사랑한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이 일이 마리아 자매가 40년 동안 걸어온 길입니다. 십자가가 곧 ‘40’입니다.
“저는 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