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르코 4,1-20) -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0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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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르코 4,1-20) -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021.1.27.)

by honephil 2021. 1. 27.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져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우리를 완전하게 해 주셨다고 전합니다. 시나이산에서 맺어진 계약은 희생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림으로써 효력이 생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악을 없애 주는 새로운 계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돌판에 새겨진 계명이 아닌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계약으로, 이제 주님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과 사랑의 친교를 맺으면서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씨앗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오신 말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날마다 청하여, 사탄이 들어와 주님의 말씀을 앗아 가지 않게, 세상의 환난과 어려움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날마다 하루를 마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의식 성찰’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마음의 가시덤불과 자갈을 걷어 내고, 하느님의 말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또한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읽거나 핸드폰이나 다른 여러 방법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18],105).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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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같은데 관계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예수님의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비유의 뜻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바깥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 이유가 비유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 죄를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죄를 용서하러 오신 분이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시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이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할 때 약간씩의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 사가들의 개인적인 구원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네 명이 믿음을 가지고 청하니 한 명의 병과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 마르코 복음에서는 공동체가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치푸리아누스 성인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에서 열두 사도는 공동체 안에 든 교회의 백성을 상징하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듣는 비유는 그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한 초대장이 됩니다. 초대장만 받았다고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분께 다가와 그분의 공동체에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듯이 이 세상에서도 당신과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구별하여 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마치 원 중심 안에 당신이 계시고 조금씩 멀어지면서 조금씩 더 차별하여 대하시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100배, 조금 먼 사람은 60배, 조금 더 먼 사람은 3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조금 더 밖에 머무는 사람은 아직 세상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여 열매를 맺으려다가 멈춰버립니다. 더 밖에 있는 사람들은 들을 때만 번뜩했다가 이내 시들어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도 세 부류가 있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세 부류로 나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와 얼마나 더 밀접한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물론 예수님께 겉으로는 가까이 있더라도 가리옷 유다처럼 본인이 거부하면 사실상은 가장 밖에 있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비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어떻게 구원받는 공동체에 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상담을 받기 위해 와서는 “아내가 많이 혼나고 반성하고 오라네요.”라고 머리를 긁적입니다.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도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이유는 너무 예쁜 아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누가 봐도 예쁜 외모를 지녔는데, 얼굴만큼이나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니 남편의 마음엔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말이 잘 통하는 여성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 것입니다. 상담사는 “아내 핑계 대지 마세요. 가장 큰 잘못은 당신이 했어요. 아내에게 불만이 있다고 바람을 피우는 게 잘하는 짓인가요?”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며칠 뒤 그 남자는 아내와 함께 상담실을 방문했습니다. 아내는 “바람이요? 그냥 사고죠. 어떻게 저 같은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담사가 남편이 마음으로 멀어졌다는 것을 말해주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예쁘기만 하면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 줄 거라고 믿었어요.”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담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도 관심을 두고 소통하려고 노력해야죠. 자신에게만 지나치게 빠져있으면 결국은 다 외로워져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참조: 『불행한 관계 걷어차기』, 장정숙, 스몰빅라이프]

 

      바람피운 남성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부부는 사랑이 오가는 관계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아내의 외모가 오기를 바랐고, 아내 역시 자신의 외모만 가꾸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둘은 서로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밭에 뿌리시는 것은 사랑의 씨입니다. 그 씨를 받아 사랑으로 돌려주는 사람이라야 그분과 가까운 공동체에 들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그분의 뜻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즉 미사 참례나 봉헌, 혹은 봉사, 기도 등만 돌려드리면 끝나는 줄 안다면 오산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미사 참례나 봉헌 등도 사랑 없이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바치는 수도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아무 조건 없이 그분의 뜻만을 따라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마음이 예수님 공동체에 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그만큼 당신과 가까운 공동체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합당하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1명, 2명, 12명, 72명 순으로 공동체를 구성하셨습니다. 물론 개별적으로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도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그분의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그만큼 큰 진리와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이 차별은 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에 기인합니다. 그러니 차별이 아니고 정의입니다. 이 세상에서 꽝이 그렇게나 많은 로또나 도박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을 수 있는 분께 나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합니다.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고 오늘도 조금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 그분께 조금 더 다가가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더 가까이 사는 공동체에 속하도록 합시다.

https://youtu.be/K_2_EIWMKAM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코  4,1-20 ) -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021.1.27.)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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