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요즈음 세계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그리고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 말미암아 평화가 사라진 듯한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새해 첫날인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축복과 평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태어나신 주님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고 은총이며 평화입니다.
우리 주님, 성자께서 탄생하신 기쁨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강생의 신비를 통한 은총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서 이 세상에 일어나게 된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인 목자들의 이야기에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시는’ 분으로 표현되십니다.
성모님의 잉태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의 삶을 성모님의 돌보심과 전구에 의탁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기도에 나오듯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고, 언제나 축복과 은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불확실하며, 어려움과 불안 그리고 고통과 실망이 얼마나 가득합니까? 또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일들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속에서 얼마나 고민합니까? 성모님과 늘 함께하고 성모님께 의지하는 삶은 우리를 하느님의 계획 안에 살 수 있게 하고, 주님의 보호와 축복이 함께하는 기쁜 신앙생활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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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임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있는 참 엄마의 자격>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도 하면서 전례력으로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믿을 교리로 반포하였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며 그 신성을 버리셨거나, 혹은 신성을 지키시기 위해 인성을 버린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늘로 오르기 위해 붙잡고 나아가야 할 사다리가 될 수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로 오르는 ‘길’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길은 하늘과 땅을 맞닿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다리의 끝이 하늘에 닿아있어야 하고 또 땅에도 닿아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다리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람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그 사다리와 같은 예수님을 낳으셨는데, 그 하나인 분을 잘라서 인간 예수의 어머니라고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왜 인간이 되셨는지를 부정하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시다고 엘리사벳이 불렀다면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요, 하느님 예수의 어머니도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어떻게 하느님 어머니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고 할례를 베풀고 아버지께서 주신 예수란 이름을 지어준 사실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참 부모가 아님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믿으셨기에 하느님께서 그분의 겸손을 보시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참으로 자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그 모범이 되십니다. 자녀들의 진정한 어머니가 되려면 자녀들의 참 어머니가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나의 마더’는 인류가 멸망한 직후 로봇 마더에 의해 아기가 키워진다는 설정을 담고 있습니다. 로봇 마더는 한 아기가 될 이미 저장된 태아 중 하나를 골라 가장 완벽하게 키우기 위해 보육과 교육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기는 로봇 엄마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인간을 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엄마를 닮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해 버린 존재일 뿐입니다. 마더는 완벽한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 위해 자신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이라고 말합니다. 마더는 소녀에게 훌륭한 인간이 되게 하려고 매일 교육하고 시험을 보게 합니다.
소녀는 완벽한 인간으로 성장했습니다. 마더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어느 날 정전이 되자 마더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정전되어도 움직일 수 있는 자신과 너무 다릅니다. 소녀는 정전을 일으킨 생쥐를 마더에게 보여줍니다. 마더는 균이 있을 수 있다며 생쥐를 불에 태워버립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생명체와 마주했던 소녀는 엄마에게 조금 실망합니다.
얼마 뒤 한 낯선 여자가 외부에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세상에 인간이란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인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마더와 똑같은 기계들에 의해 총을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더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소녀는 마더를 조금씩 의심하게 됩니다. 그 여자가 말한 대로 엄마는 자신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갑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미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여 시험에 실패하면 계속 소각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봇은 최고의 엄마가 되기 위해 태아들을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딸은 낯선 여자와 벙커에서 탈출합니다.
그러나 밖에 낯선 여자의 주장대로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낯선 여자도 혼자뿐이었습니다. 사실 낯선 여자도 평생 버려진 컨테이너에서 혼자 살아왔던 것입니다. 낯선 여자는 소녀에게 이곳에서 같이 살자고 회유합니다. 낯선 여자에게도 속았다고 생각한 딸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딸은 다시 마더에게서 자라고 있는 남동생을 구하러 벙커로 돌아갑니다. 이때 마더가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 인류의 어머니가 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소녀는 남동생을 빼앗고 마더를 죽입니다. 그러나 마더의 본체는 그것 하나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실패한 마더도 더 완전해지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제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마더가 어떻게 올바른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시험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장된 태아의 숫자가 다 소진될 때까지 한 명의 아이도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고, 로봇 마더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것 하나는 ‘자신이 그 아기의 원천도 아닌데 어머니가 되려고 하는 모든 인간 어머니들이 가진 교만의 위험성’입니다. 아기들은 배아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고 로봇 마더는 그 아기들을 최대한 완벽한 모성애로 키우려 합니다. 그렇게 완벽한 인간들이 태어나야 좋은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봇이 생명을 창조할 능력이 없습니다. 배아를 키우면서도 자신이 어머니라고 믿게 하려는 것 안에서 아이도 혼란스러워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해도 아이는 로봇에게서 인간답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드님께 할례를 베풀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지어주고 하느님께 도로 봉헌할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아이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셨습니다.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부터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아기의 부모가 하느님임을 인정했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자격은 ‘겸손’입니다. 아이의 생명이 내가 아닌 주님에게서 오기에 아기는 나의 것이 아닌 그 생명의 주인의 것이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아닌 당사자가 그 생명을 완벽하게 키워낼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겸손하게 아드님이 당신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주님의 것이라 인정해드렸습니다.
이런 자녀 봉헌을 가장 잘하는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할례는 물론이요, 성인식 때 이미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번 주식 동학혁명의 선봉장이라 불리는 ‘존 리’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성인식 때 5천만 원 정도를 아이에게 유산으로 주며 그것으로 경제 공부도 하며 주식도 잘 불려보도록 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역할을 내려놓고 사춘기 전에 참 부모인 하느님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로봇이 아무리 아이에게 주입식 공부를 시키더라도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하며 자신이 어머니란 소리를 계속 들으려고 한다면 결국 영화에서처럼 스스로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든 어머니들도 지금 테스트를 받고 있습니다. 자녀를 주님께 돌려드려 성모님처럼 테스트를 통과하여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자신이 어머니가 되려다가 결국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 것인지.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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