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6-56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 가져다준 기쁨과 놀라운 믿음을 지닌 여인들의 찬미가를 들려줍니다. 우선 루카 복음서는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를 전합니다. 이 노래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에 가장 복되시며”(1,42)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기쁘게 칭한 데에 대한 마리아의 답이었습니다. 게다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선물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을 선언하며 마리아의 찬미를 유도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가 됨을 기리는 마리아의 말은 엘리사벳에 대한 답례를 넘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였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상황과 주제 그리고 작성법의 세 가지 측면에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 참조)와 비슷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 찬미가를 부르기 직전, 한나가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을 약속대로 주님께 바치려 엘리 사제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수직적인 자비와, 비천한 이들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속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수평적인 자비를 찬양하며, 마지막 구절에서 하느님의 구원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동정녀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다림 속 회개의 시간인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 ‘마리아의 노래’를 다시 불러 봅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나는 왜 기쁜가? 나의 완성됨으로 부르는 노래, 마니피캇>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마티피캇’을 노래하시는 장면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 노래는 성모님 생애에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입니다. 사람은 행복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 찬송은 인간이 어떤 때 궁극적 기쁨을 누리는지 잘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궁극적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이 벌어 빨리 은퇴하여 슬슬 여행이나 다니고 싶다고 합니다. 그것이 궁극적 행복일까요? 돈이나 쾌락, 명예는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입니다. 몸은 행복할 수 있으나 성령께서 함께하실 수 없기에 마음은 공허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을까요? 분명 제대로 뛰고 있다면 결승전을 통과하는 것처럼 인간의 창조 목적이 완성되는 때는 인간 창조가 완성되는 때일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미완성의 행복만을 누립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주님을 찬송할 때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인간의 완성 시점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지향하신 무언가가 성취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바로 이 창조된 우리 자신이 성취되는 때이고 이때 참 기쁨을 누리고 참 찬미가 솟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주님을 만나는 때? 그것보다 더 가야 합니다.
유튜브 채널 ‘ODG; 입양 가족의 과거 사진 같이 보기’에 입양된 아이와 엄마가 현재 사진부터 시작하여 입양할 당시의 과거 사진까지 함께 보며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엄마랑 오늘 함께 동하(7세)와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 같이 볼 거야. 엄마는 집에서 주로 뭐 하는 거 같아?”
“밥하고 우리 씻기고 우리 재우고 영어 공부하고 ... ”
“그럼 이제 함께 사진 볼까? 이거 기억나?”
2020년 초밥 식당에서 엄마와 남동생 동주(4세)와 함께 먹는 사진이 나옵니다.
“어!”
바나나 인형을 입은 엄마와 동하와 동주.
“웃기지?”
조금 더 어린 동하가 아빠 자동차 세차하는 거 도와주는 사진.
“동하 세차 엄청나게 잘하는데. 엄마 이거 동영상 찍어놓은 것도 있어. 어땠어?”
“그때 아빠 도와주어서 기분이 좋았어!”
동하가 유치원에서 공연하는 모습.
“엄마는 저 때 동하밖에 안 보였어. 너무 예뻐서.”
아빠가 두 아이를 함께 업고 있는 사진.
“너희 둘이 합치면 거의 40kg이야. 아빠 무겁겠다.”
사진이 점점 뒤로 가면서 동하와 동주는 계속 어려짐.
“동하, 동주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엄청나게 싸웠지? 동주가 동하 장난감 다 가지고 싶어 했지. 그래서 동하가 진짜 양보 많이 했는데. 그치?”
2017년 둘째(동주) 입양 사진.
“동하, 혹시 동주 만났을 때 기억나니? 어떤 것들이 기억나?”
“동주 얼굴 봤을 때랑 동주가 나 안아주었을 때. 가장 기뻤어.”
“아, 진짜? 엄마는 그게 동주한테 좀 슬픈 순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동하 처음에, 동주 오고 나서, 동주가 너무 아기니까 동주만 막 안아야 하고 동주만 챙겼었잖아. 그래서 동하가 질투가 났을 것 같은데 어땠어?”
“마음이 조금 속상했어.”
“그런데 동하가 동주 안아준 이유가 뭘까?”
“동주 좋아서.”
“조금 속상하지만, 동주 좋아?”
“응!”
“동하는 왜 동주만 좋아해 주냐고 그랬잖아. 근데 동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하가 있을 때는 동하한테만 잘해줬어. 동하만 데려 다니고 동하만 예뻐해 주고 동하만 재워주고. 왜냐하면, 동주가 없었을 때는 동하 혼자만 있었으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해변에 밥 먹으러 가는 사진이야. 동주가 사랑 독차지할 때. 저거는 디즈니랜드 갔을 때야. 동하가 이거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 혹시 동하가 기억 못 하더라도 이런 사진 보면서 엄마 아빠가 동하만 엄청나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는 거 기억하라고 사진 찍어놓은 거야.”
2014년 동하 처음 만났을 때의 사진.
“동하 아빠, 엄마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지? 엄마가 어떻게 만났는지 좀 설명을 해 줄게. 엄마가 제일 기억나는 거는. 동하 위탁 어머니가 동하를 건네주기에 엄마가 동하를 안았는데 동하가 엄청나게 울었었던 거 같아(엄마 약간 그때 기억하며 훌쩍임). ... 엄마는 그때 동하가 우는 것도 예쁘다고 했던 것 같아. 엄마가 갑자기 엄마가 되어서 아기를 볼 줄 몰라서 할머니 집에 아빠랑 같이 3개월 살았었는데, 할머니가 뭐라 그랬느냐면 ‘네가 아이를 낳아도 동하보다 예쁜 아이는 못 낳는다’라고 하셨어. 이거는 동하 돌 때 사진. 이거는 동하 오고 나서 첫눈 올 때 찍은 사진. 동하한테 첫눈 보여주고 싶어서 옷 둘둘 싸매서 밖으로 나갔던 거야. 끝났어.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음…. 엄마가 나 이렇게 잘 키워줘서 고마워! 엄마 좋아!”
엄마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흘림. 서로 안아 줌.
“엄마는 동하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하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이 없어.”
“엄마랑 오래오래 함께 잘 살고 싶어.”
“엄마도. 엄마 건강해야겠네.”
엄마의 눈물은 동하의 행복과 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행복하게 해 주고 또 엘리사벳의 감사를 받았을 때와 같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넘어서서 타인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참으로 찾아옵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창조하셨고, 하와는 아담의 도움이 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때 창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죄는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타인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존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게 되는 이유는 원죄에서 회복되어 내 존재 자체가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을 찬미할 때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잉태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벳을 행복하게 해 주고 그것에 감사를 받았을 때입니다. 인간의 충만한 완성의 순간이기에 행복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행복과 찬미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저절로 나옵니다. 그때 성모님과 함께 참으로 마니피캇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영성의 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2020.12.25.) (0) | 2020.12.25 |
---|---|
[묵상]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2020.12.24.) (0) | 2020.12.24 |
[묵상]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대림 제4주간 월요일 (2020.12.21.) (0) | 2020.12.21 |
[묵상]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대림 제4주일 (2020.12.20.) (0) | 2020.12.20 |
[묵상]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대림 제3주간 토요일 (2020.12.19.) (0) | 2020.12.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