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스바니야는 히브리말로 ‘주님께서 피난시켜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레미야 예언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성전 주위에 머물며 심판을 예고하고, 동시에 열심히 살려는 이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와 민족들에 대한 심판, 복구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 세 장뿐인 스바니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 전반부를 대림 시기의 한가운데인 오늘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바니야는 이방 민족들의 회개와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언급한 뒤, 남은 이들의 신앙 자세를 ‘가난한 자’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가난함이란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영성적으로 ‘마음이 가난함’을(마태 5,3 참조)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의 삶의 자세가 과연 무엇인지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싫다고 답하였지만 마음을 바꾸어 밭에 가서 일하는 맏아들과, 가겠다고 답하였지만 실제로는 일하지 않는 다른 아들의 태도에서 무엇이 중요한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분을 기다리는 이때에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순종을 뜻하는 라틴어는 ‘집중해서 잘 듣는다.’라는 표현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생각을 접는 기도와 함께, 그분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가난한 자로 사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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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자기암시에 불과하다고?>
제가 오직 믿음만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예도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거나 오랜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 그렇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능력으로 노력해서 삶이 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교리인데도 모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강조하면 개신교 신앙이냐고 하고, 믿음으로 변한다면 연기자들이나 가수들이 긴장될 때 거울을 보며 ‘난 잘할 수 있어!’라고 수없이 되풀이하는 ‘자기 암시’와 뭐가 다르냐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믿음을 그저 자기 암시 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서 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이런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맏이는 결국 ‘그래, 그래도 난 아버지의 아들이지!’라는 믿음을 회복한 것이고, 둘째는 ‘근데 그분이랑 나랑 뭔 상관이야?’라며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러며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세리와 창녀까지 요한이 제시하는 ‘의로운 길’을 믿으니 변화하였는데, 왜 그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믿음이 단지 거울을 보면서 ‘나는 할 수 있다!’라며 자기암시를 하는 것과 같을까요? 물론 자기 암시도 효과가 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정체성 자체가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우리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변화를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지 못함이 아니라 오히려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자신이 변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남습니다.
가톨릭에서도 믿음으로 삶이 완전히 변한 신앙인들이 많지만, 오늘 복음의 세리와 창녀의 변화를 생각하다 보니 ‘CBS 새롭게 하소서’에 나와 간증한 조윤숙 목사가 생각이 납니다. 그녀는 화류계의 여왕으로 살다가 회개하고 목사가 된 분입니다.
조윤숙 목사는 강원도 정선에서 가난한 5남매의 딸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서울에 있는 어느 집의 수양딸로 보내졌습니다. 자녀들이 다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고아로 성장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유명한 요정에서 마담으로 화류계를 시작하였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까닭에 인기가 높았습니다. 자신의 요정을 차리고 바닥에 뿌리고 발로 치우며 다닐 정도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고급 외제차에 고급 운동,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과 담배, 나이트클럽을 돌아다니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헛헛한 마음은 무당을 찾아다니며 달랬습니다.
요정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사채업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뒤를 봐주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부도를 맞고 빚쟁이들과 형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죽기 위해 설악산에 갔습니다. 부모님 산소에도 형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갈 수가 없었고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만날 수 없다는 고통이 더 깊이 사무쳤습니다. 수면제 60알과 동맥을 끊기 위한 면도칼, 그리고 소주 한 병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길 아스팔트 위에 작은 틈을 비집고 자라는 새싹이 보였습니다. 삶의 무상함 속에서 작은 생명의 위대함이 묵상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보니 창조주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녀본 적이 있어서 하느님이 계신다면 내 꼴이 이게 뭐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죽어야겠다고 더욱 굳게 결심하고 계속 올랐습니다.
죽으려고 하기 직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순간부터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사진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 뒤에 엷은 천으로 가려져 있고 누군가가 서 있었습니다. 모든 자신의 삶 뒤에 똑같은 사람의 모습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엄마 죽지마’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었다.”
이 음성을 느끼는 순간 자신을 경직되게 만들었던 어떤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됩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12시간 동안 수면제를 하나하나 계곡물에 던지며 이전의 삶을 버렸습니다. 꼬박 12시간 동안 울고 나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중에 여자 두 명이 다 찢어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며 “미친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머리를 잡고 싸웠을 텐데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저 미친년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내려왔습니다. 경찰들이 말하기를 빚쟁이들이 그녀를 감옥에 넣어봤자 어차피 빚을 갚을 수 없으니 요정을 다시 일으켜 빚을 갚도록 하는 게 좋다고 고소를 취하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술집을 하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빚쟁이로 도망치는 것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술집을 하니 교회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몰래 다녔다고 합니다. 빚을 다 갚고 목사가 됩니다.
조윤숙 목사가 변한 것은 소위 ‘자기 암시’ 때문이었을까요?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런 변화를 이뤄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가 길거리에 있는 걸인을 예수님으로 믿게 된 것은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김하종 신부가 가난한 아저씨에게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목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어떤 이들이 신앙은 그런 자기암시가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앙은 무엇이란 말일까요? 결국, 혼자의 노력으로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유다 지도자들의 메마른 신앙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셨다는 믿음, 이웃이 그리스도로 보이는 믿음, 또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 이 믿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 하고 본인 노력으로만 변하려 한다면, 한다고 해놓고 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만으로 변하고 믿음만으로 구원됩니다. 결코, 교회 내에서 유일한 의로움의 길인 믿음의 힘을 깎아내리는 생각들이 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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