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와 마태오 복음서는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이는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뒤, 시인은 잔혹한 전쟁의 폐해를 시에 담았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라고 하는 독서와, 복음에서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하신 예수님의 탄식과도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엘리엇 시인은 ‘황무지’를 쓰며 고대의 성배 전설을 참조합니다. 늙고 병든 왕의 나라에 재앙이 일어납니다. 왕은 재앙을 물리칠 지혜롭고 힘센 젊은이를 찾습니다. 마침내 한 젊은이가 성배를 가지고 나타나 재앙을 물리치고 새 나라를 건설합니다. 시인은 현대 사회의 재앙을 황무지에 비유하면서도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듯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불의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제시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화답송의 시편도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분’이라고 희망을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십니다. 올해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황무지’ 같았습니다. 고난을 극복할 희망을 주시는 분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이 대림 시기에 다시 한번 명심합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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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늘나라에 폭력을 쓰는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것이 하늘나라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폭력배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폭력을 당하시는 이유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세례자 요한은 일반 대중에게 예언자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예언자라고 여기는 이가 하는 말에 귀를 막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께는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보석을 잘 감정하는 사람이 어떤 보석을 한 움큼 들고 와서 “이 보석만큼 큰 가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하나씩 나누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콧방귀도 안 뀌고 그 말을 무시하고 받은 보석을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이것은 예언자에 대한 폭력을 넘어서서 가장 귀한 보석과 그 보석을 주려는 마음에 대한 폭력입니다. 꼭 폭력을 써야 폭력이 아닙니다. 사랑을 삐딱하게 봐서 거부하는 것이 폭력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귀를 막는 것이 사랑에 대한 폭력입니다.
왜 세상은 그리스도께 대한 폭력을 쓰게 되었을까요? 자신들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에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보석보다는 커다란 쇳덩이가 더 귀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보석은 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영화가 있습니다. ‘파반’은 인도의 한 평범한 청년으로 약혼녀와 혼인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건장한 청년입니다. 장인 될 사람이 집을 마련할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 일, 저 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5살 정도 된 길 잃은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소녀의 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지만, 소녀는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과 하나를 주고 그냥 돌아섭니다. 하지만 아이는 파반을 계속 따라옵니다. 마음씨 착한 파반은 그동안 모은 돈과 아이를 데리고 장인에게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갑니다.
사실 소녀는 문니라는 이름을 가진 파키스탄 산골 마을에 살던 아이였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와 영토분쟁, 과거사 등으로 원수처럼 지내는 나라입니다. 문니가 절벽에서 떨어질 뻔하며 매우 놀라, 말을 하지 못하게 되자 소녀의 어머니는 돈을 모아 소녀가 말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인도의 신에게 기도하러 왔다가 소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파키스탄으로 돌아갔고 문니는 그렇게 말도 못 하면서 홀로 남겨졌습니다.
파반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많은 돈을 내고 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아이를 넘깁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팔찌를 사서 다시 그곳에 가봤더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부모를 찾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팔아넘기는 나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파반은 끝까지 아이를 찾아내어 구해옵니다.
그리고 아이가 고기를 먹는 이슬람 전통에서 자란 것을 알게 됩니다. TV에서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크로켓 경기가 열리자 혼자서 파키스탄을 응원하는 것을 보고는 아이가 파키스탄에서 온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파키스탄 비자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은 돈을 써가며 몰래 아이를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밀입국합니다. 이 와중에 신분이 들통나서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탈출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첩자가 아이와 함께 들어왔다며 지명수배를 내립니다. 도망 다니는 중에 찬드 나왑이라는 파키스탄 기자를 만나고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파반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에 왔고 문니의 부모님을 찾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영상으로 찍어 방송으로 내보냅니다. 그러면서 경찰에 잡히지 않게 여러모로 도와줍니다.
파키스탄 성지에 갔을 때 엄마도 아기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왔었고 그것이 영상에 찍히며 아이는 엄마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파반과 기자 나왑, 그리고 문니는 어머니가 타고 간 버스의 종착지를 알아내고 그곳으로 아이를 데려갑니다. 아이는 자신의 동네가 나오자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파반은 아이를 기자에게 넘겨 엄마를 찾아주라고 하고 자신은 도망치며 경찰의 시선을 끕니다. 아이는 엄마를 만나고 파반은 경찰에 잡혀 심한 폭력과 고문을 당합니다. 인도의 스파이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는 기자 나압은 다시 인터넷으로 이 모든 사실을 영상으로 올립니다. 파키스탄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까지 이 영상을 보고 파반을 구하기 위해 일제히 일어섭니다.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 증오를 끝냅시다. 우리에겐 이게 필요합니다. 두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위한 증오가 아닌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니 이 증오를 끝냅시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도 여론에 못 이겨 파반을 인도에 양도합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파반은 양국 국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으며 인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문니는 파반을 부릅니다. 파반은 말을 할 수 있게 된 문니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는 ‘카쉬미르의 소녀’란 영화고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카쉬미르라고 하는 분쟁지역의 한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주기 위해 파반은 결혼도 미루고 결혼자금으로 남의 나라에 들어가 스파이처럼 취급당합니다. 파키스탄 정부가 왜 파반을 스파이 취급하며 폭력을 행사하였을까요? 기자의 말대로 ‘증오’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증오하는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한 아이를 위해 그런 희생을 치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증오의 나라에서 사랑은 폭력을 당합니다.
이 세상은 증오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적어도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 “행복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입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을 믿는 이들은 증오의 눈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사랑 자체이신 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돈과 경쟁과 쾌락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사랑으로 오신 분을 받아들일 수도 없을뿐더러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들과 같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는 사제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참 행복’ 임을 깨닫고 나서는 그 부르심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귀’는 이 깨달음을 말합니다. 세상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무관심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만이 참 행복의 길임을 깨닫지 못한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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