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느님의 집을‘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유다교에서 성전은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의 의식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사제들은 조를 나누어 돌아가면서 성전에 머물며 봉사하였습니다(1 역대 24장 참조). 그렇다고 성전이 제사를 바치는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복음서에서 성전은 가르침의 장소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이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사도들과 신앙인들에게 기도의 장소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십자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행동은 성전만이 아니라 유다교의 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성전이 참의미를 잃고 수단과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종교의 모든 제도는 하느님을 잊은 채 인간의 이익만을 위하여 남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삶의 태도와 생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나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신앙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 가치를 되돌려 놓는 것이 정화의 참뜻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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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언제 강도들의 소굴이 되는가?>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며 슬퍼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우리 모두도 성전인데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면 예루살렘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호되게 야단치십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지 못하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자연인으로 소개된 인물 중에 ‘씨돌’씨가 있습니다. 본명은 김용현이고 세례명은 요한입니다. 그는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SOS 어린이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미혼으로 사는 여성이 고아 아이를 맡아 기르는 시스템인데 1호 엄마의 1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TV를 통해서입니다. 맨발로 벌거벗고 다니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다시 SBS 스페셜 제작팀에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을 방영하여 그의 실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당시 가장 앞에서 언제나 자리를 지켰던 인물입니다. 고문으로 허리를 다쳐 평생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군대에서 기압을 받다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정연관 상병의 누명을 벗겨준 장본인도 김용현입니다.
17년 만에 정 상병이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참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밝혀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구조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려고 할 때 사라졌습니다. 그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그를 ‘의인’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출혈로 병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아왔느냐고 묻는 말에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왼손으로 이렇게 씁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그에게 인간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 분은 당연히 그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왜 사제들과 종교와 단절하고 산에서 살았을까요? 최근에 종교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안다고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게 아니야. 측은지심이 필요해. 신천지는 개천지. 종교가 기생충. 종교가 다 거짓말해.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 도둑놈들.”
저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이분의 삶을 존경하면서도 이분을 끝까지 품어주지 못했던 우리도 반성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까지 요한이란 이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책임도 크겠습니다.
‘기도의 집’이 왜 ‘도둑의 소굴’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후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즉, 날마다 진리의 가르침이 지속하지 않기 때문에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고,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이 멈추면 그 자리에 세속적 욕심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주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제보를 받은 제작팀은 4차선 도로 밑에 작은 움막을 짓고 산에서 약초나 떨어진 이삭 등을 주워서 끼니를 때우며 사는 한 사람을 취재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와 동생과 누나를 부양하겠다며 돈을 벌러 집을 뛰쳐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벌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왔으니 성공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34년을 길거리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제작진은 누나를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고 싶냐고 했더니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니 동생도 누나를 만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34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누나는 왜 살아있었으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며, 그 세월을 허비한 게 아깝지 않으냐며 오열하였습니다. 동생도 눈물을 흘립니다.
만약 제작팀이 그분의 가족을 찾아서 그 가족의 마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이 프로그램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마음을 알려주어 동생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렇게 34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집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과 항상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나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 받은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지속되어야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이 없다면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란 말을 다시 듣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받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전할 말씀을 받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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