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는 대조와 역설을 통하여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도 그러한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는 핵심 내용을, 굳이 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하느님이 서로 대비됩니다. 이 둘은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의 호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부는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가 졸라 댑니다. 그제야 재판관은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하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귀찮음 때문이지만 계속 졸라 대는 과부의 청은 불의한 재판관마저도 마침내 올바른 판결을 내리게 만듭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판관과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납니다. 불의한 재판관조차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제 비유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인 과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바라는 과부의 간절함은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간절함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분명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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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
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믿음’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선 ‘주님의 종’이 됩니다. 계속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엔 주님의 종이 된 것에 ‘감사’해 합니다. 사탄의 종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입니까? 그리고 오늘은 ‘꾸준히 기도’한다고 마무리하십니다.
기도는 무언가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려 찾을 때 조금 찾다가 포기한다면 그 물건이 거기에 있을 것이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재판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끊임없이 청하자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준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다음에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쳐야 한다고 하시며 밤에 빵 세 덩어리를 얻으려고 친구의 문을 끈질기게 두드린다는 비유입니다. 세상의 것을 달라고 끊임없이 청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것들도 들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하게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른 것처럼, 기도하며 주님을 뵈면 나에게 영향이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노인 신자분이 아침 일정한 시간이 되면 성당에 기도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단 1분이라도 좀 앉아계시지’라고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병원에 입원하여 임종을 앞두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그 병원에 찾아간 신부님은 그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부님이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좋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체 대전에 나가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당에 갈 수 없으니 그분이 매일 찾아오셔요. 제 이름을 부르며 ‘요셉아, 내가 왔다’라고 인사하고 가십니다. 아침마다 예수님께 이렇게 인사를 받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보상을 받습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그 보답이 ‘성령’입니다. 만약 그 보답을 받았다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은 기도 안에서만 오시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한 청년이 코로나로 성당에 나가지 못하다가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미사에 다니기로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안 좋은 일도 있고 해서 한 달 정도 주일미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일도 꼬여 화를 많이 내게 되고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기도 안에서 받아오던 것이 끊어졌을 때 꾸준히 기도하던 사람은 대번 그 은총의 끊어짐으로 오는 고통을 체감합니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 고프고 물을 안 마시면 목이 타는 것처럼 너무도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죄명은 ‘낙담시키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불안한 말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는 총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반역죄가 적용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끊임없이 ‘기도하면 뭐해?’라고 반역을 일으키는 자아의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꾸준한 기도는 이 자아의 목소리를 이겼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만듭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주님의 기도 꼭 한 번씩이라도 바치며 성령을 청합시다. 지옥에 가면 하루 단 2분도 꾸준히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청해서 은총을 받아보기만 한다면 절대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면 됩니다. 기도가 꾸준하지 않다면 아직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 가장 적게 기도한 시간이 나의 믿음의 정도입니다. 기도를 몰아서 많이 하는 것보다 짧더라도 꾸준한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 최소한의 기도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꾸준히 지켜나가도록 합시다.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꾸준함’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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