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면서,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68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지금은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사명을 거듭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 오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중 마지막 전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면서 2017년부터 한 주 앞당겨 지내고 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힙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어 달라고 청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은 다소 냉정하게 들립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비로운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간청하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주인은 문을 열어 줄 법하지만 그리하지 않습니다. 유다교에서 ‘닫힌 문’은 놓쳐 버린 기회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마지막 때에,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준비가 필요하며 그 준비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등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서 받을 수 있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을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열 처녀의 비유는 마지막 때가 아닌 지금의 삶에 관심을 두게 만듭니다. 지금이 혼인 잔치를 위한 기름을 준비할 때입니다.
현재의 삶에 따라 슬기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금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유다교의 ‘닫힌 문’의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고 여전히 우리의 삶 안에서 종말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수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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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까지 가겠다고?>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 말씀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지금 심판에 관한 복음이 나오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준비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얻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꾸준해야 합니다. 사막 달리기 대회에서 가끔 탈수로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규칙적으로 물을 마셔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려고 하면 늦습니다. 아플 때 치료하려고 하면 늦는 것과 같습니다. 연료가 다 떨어져 도로에 섰을 때 기름을 넣으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지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쉬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름을 넣으려고 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명한 처녀들의 오늘 행동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기름이 떨어진 동료들에게 자신의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행동입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라도 좀 나누어주어 다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면 좋은 일 아닐까요? 기름을 좀 나누어달라는 동료들에게 현명한 처녀들은 이렇게 모질게 말합니다.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현명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주어도 기름이 모자라게 될 것이란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추측으로 그럴 것 같아서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의 자세일까요?
어떤 유명한 스님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랬습니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자기는 천국에서 잘 살고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모른 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이라면 지옥으로 가서라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불교에는 ‘지장보살’이 있습니다. 그는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입니다. 그 스님은 이런 것이 사랑이지 지옥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내버려 두는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불교에서는 모기도 조상으로 봅니다. 그러면 모기를 구제하기 위해 모기떼 가운데 가서 뜯기고 있을 스님이 있습니까? 혹은 뱀이 득실대는 곳에서 교화하려는 스님이 있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기가 회개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모기보다 더 그 본성이 모기다워진 지옥의 영혼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명한 처녀들이 등잔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잘한 일입니다. 자칫 자신의 등잔이 꺼지면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가 되면 나누어주고, 어느 정도가 되면 상대가 지옥에 가더라도 나누어주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상에서 유다를 가차 없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거기까지가 그분이 기름을 나누어주실 수 있는 한계였습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강의 부탁을 많이 받아서 강의를 많이 하다가 지쳐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가면 안 됩니다. 이는 수영도 못 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결국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살겠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영화 ‘그랑 블루’(1988)는 프리다이빙을 하는 엔조와 자크, 그리고 돌고래와 바다, 또 자크를 사랑한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엔조와 자크는 친구 사이지만 또한 누가 산소통 없이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경쟁 관계기도 합니다. 자크는 특별한 폐를 가지고 있고 특별히 돌고래와의 소통이 마치 가족과 같습니다. 이 와중에 자크를 사랑하게 된 조안나가 등장합니다. 조안나는 자크를 사랑하지만, 자크는 자신보다 바다와 돌고래를 더 좋아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다와 돌고래와 함께 하는 시간의 1/10 정도만 자신과 함께 하는 자크를 몇 번이고 떠나고 싶지만, 임신까지 합니다.
엔조와 자크의 경쟁에서 엔조는 경쟁심을 못 이기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자크도 무언가 찾기 위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조안나는 자신에게 아기가 있다고 말립니다. 하지만 자크는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자크는 밤 속 깊고 어두운 곳에서 돌고래의 인도를 따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립니다.
이야기는 엔조와 자크가 무언가 고향을 찾은 느낌을 주지만 혼자 남겨지는 엔조의 어머니와 임신한 자크의 애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자크는 물속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물에 들어가면 항상 나와야 하는 더 큰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자신의 아기를 가진 자신만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사랑보다 물속의 돌고래가 더 좋다면 그 물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지옥에 떨어진 내 친족이 더 좋으면 자신도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이것 때문에 현명한 처녀들은 남은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대죄를 짓지 않을 정도의 기도시간을 찾아냈습니다. 세 시간 정도는 기도해야 알고 짓는 죄를 간신히 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소 기도시간이고 이것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더 많은 영혼에 도움을 줄 힘이 된다는 것도 압니다.
내가 어느 정도의 기름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 알려면 기도를 통해 죄를 이겨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최소량의 기름의 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나누어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명한 처녀는 규칙적인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그 기도시간도 명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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