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2020.11.3.)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2020.11.3.)

by honephil 2020. 11. 3.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하느님의 초대와 그것에 대한 거부는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주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초대와 사람들의 거부를 주제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언제 열리는지 미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준비되었을 때, 때가 되었을 때, 주인은 이미 초대받은 이들에게 잔치에 오라고 알리지만 사람들은 초대를 거부합니다.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을 사고, 겨릿소를 부리고, 장가를 들었다는 다양한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처음에 초대하지 않았던 이들을 불러 그의 집을 가득 차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처음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유다인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떻게 포함되었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초대하셨고 우리는 초대받은 사람들이지만 초대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 나라가 준비되었을 때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하듯이 그 시간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준비와 응답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대에 준비하고 응답하기 위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더 많이 실망하기 위해>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을 초대한 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부자이기에 특별하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교만’이 그들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식탁에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었지만,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밭을 샀다고, 어떤 이들은 소들을 사서, 또 어떤 이들은 결혼했기 때문에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세상 것들이 하느님 혼인 잔치 초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화가 나서 길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 눈먼 이들과 다리를 저는 이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면 모두 데려와 잔칫상이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세상 것들이 자신을 더 영광스럽게 해 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많은 실망’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생무상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힘에 의지하지 못하게 되고 주님 초대에 ‘감히 내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30세 초반에 엄청난 영토를 정복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만큼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인생무상을 깨달았고 그래서 가장 비천한 이들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로 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 번의 눈물로 익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익어가야 합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시아 원정을 하였을 때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 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인더스강 강가에서 인더스강만 건너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몸이 따라주지 않고 지친 부하들도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정복만 하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쓰러뜨린 부하도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나 자신을 쓰러뜨린 사람이나 다 한 무덤만 남기는 그런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깨지며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작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세상 모든 것들이 허무하여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낄 때 비로소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주님께서 나도 그렇게 초대하고 계심이 보이게 됩니다.

 

      저는 저의 대학 친구들을 계속 만나며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봅니다. 처음엔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사업을 하여 사회에서 잘 나가고 멋진 아내를 얻는 모습에 의기양양했습니다. 이때는 서로 바빠서 친구를 찾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 넘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사업의 한계를 느끼고 명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고 배우자와의 사이가 벌어지자 우리 친구들은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겸손해지자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이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안에는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녀들이 그들처럼 뛰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이 자녀에게도 실망하여 자신의 기대를 채워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가난한 사람도 보이게 되고 하느님도 찾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배에 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자신들을 크게 만들어줄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런 것들을 지푸라기처럼 여겼습니다. 어차피 홍수 한 번이면 다 쓸려버리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품을 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또 그런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더 많이 깨져서 더 겸손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도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가난하고 다리를 절며 눈이 먼 장애인 중의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https://youtu.be/A6hZkSdrfr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2020.11.3.)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