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노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이고, 파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파랗게 보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의 색안경을 하나씩 끼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성악을 하는 제 친구는 음악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성악과 관련된 것에 무척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목소리, 가수들의 노랫소리 등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관심을 두고 듣습니다. ‘음악’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는 바리사이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이는 바리사이가 낀 색안경과 예수님께서 끼신 색안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리하여 식사 자리에서 율법에 따라 손을 씻느냐의 여부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색안경을 끼셨습니다. 식탁에 그릇과 음식이 놓일 때 그분께서는 그 음식들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십니다. 마치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자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식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우리는 어떤 색안경을 끼고 살고 있습니까? 성찬의 식탁에 올려진 성체와 성혈을 사랑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제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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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의 초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일종의 관습법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지목하는 이들이 바로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 안에 초대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우리는 예수님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도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의 인격체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나 율법으로 초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나 율법은 인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집에 초대해야 구원을 받는데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머리로만 초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리사이의 초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개신교 목사님 중의 한 분인 유기성 목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현재 ‘영성일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녁에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때를 되돌아보고 뉘우치는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을 펼치게 된 이유는 대부분 신도가 예수님을 바리사이처럼 초대하기에 삶의 변화가 없음을 본인 스스로 체험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기성 목사는 목사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는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렇게 목사가 되었고 군목으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훈련 도중 다리에 중상을 입고 의사는 다리 절단 소견을 내렸습니다. 이때 그가 찾은 것은 하느님 아버지가 아닌 육체의 아버지였습니다. 수원에서 사목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좀 해달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매달렸습니다. 다리 절단 수술은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야 비로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다리를 고쳐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던 중 지난날의 죄를 깨닫고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군 선교를 위해 군목으로 간다는 마음보다 마음속 진정한 동기는 사병보다 장교가 편하다는 마음에서였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군목의 특권으로 목사안수도 일찍 받고 유학도 다녀와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를 고쳐달라는 기도가 점점 “이 오른쪽 다리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라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또 “이제 진짜 주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이 가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그분은 ‘내가 바뀌고 있구나!’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두 번의 수술을 더 거쳐 다리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아는 것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십계명만으로 모두가 구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으로만 이뤄집니다. 우리에게 이 시간이 성찬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인격적으로 그분을 우리 집에 초대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웃의 잘못을 심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초대했다면 나의 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처럼 머리로만 초대했다면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그 율법으로 이웃을 심판합니다.
‘자비의 예수님’을 환시로 보고 그림도 그렸던 성녀 파우스티나는 처음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그녀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 갔을 때 원장 수녀님만은 달랐습니다.
“이 집의 주인님께 가서 자매님을 받아들이시겠느냐고 여쭈어보십시오.”
그녀는 곧바로 성당으로 가서 기도하였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받아들인다. 너는 내 마음 안에 있다.”
원장 수녀님은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셨나요?”라고 물었고 그녀가 “예”라고 대답하자, 곧 “주님께서 받아주신다면 나 역시 받아들입니다” 하며 그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성녀가 되었습니다. 다른 수도회 원장 수녀들은 파우스티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수녀원에 예수님을 실제적으로는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초대했나요, 아니면 바리사이처럼 초대했나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삶의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원도 불가능합니다. 나를 바꾸는 것은 마음이지 머리가 아닙니다. 머리로 초대하지 말고 마음으로 초대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 안에서 ‘탐욕과 악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자신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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