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예수님을 주인은커녕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메시아를 믿지 않은 것도 아니고, 메시아에 대하여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자렛 촌놈 예수는 아니다.’라는 완고 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당신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운명이라는 것이 어이없게도 제자의 배신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자 길을 나선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대개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익숙합니다. 선한 것은 악한 것과 결코 섞일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제 눈에 싫은 것을 악하다며 어깃장을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 악하고 더럽고 모자란 것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지식으로, 약하고 부족하며 때로는 죄스럽고 비참한 사람들의 주님을, 그리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단죄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 단죄가 오늘 또다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바로 그 제자의 민낯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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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마땅하고 옳은 일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삶을 새로운 빛과
깊은 기쁨으로 채울 수 있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에서
주님,
복음적 삶에 충실함은
거룩한 기쁨에 젖는 것임을 생각합니다.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서
사랑의 향기가 솟고
희망의 노래가 찬양으로 흐르는
믿음의 길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름답다는 것,
봄길의 자연처럼
증거하는 저희 믿음이게 하소서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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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간 목요일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 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16-20)
‘사제는 행정가가 아닙니다’, ‘교회는 봉건 영주가 통치하지 않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기회 닿을 때마다 누누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입니다. 그런 우려가 있으신 것이죠. 교회의 조직화, 경색화, 관료주의화에 대해 경종을 울리시고자 하는 것이죠. 우리는 군림하는 이들이 아니라 봉사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알기는 아는데 잘 안됩니다. 남들이 내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 흐뭇하고 우쭐하고 으쓱한 것이 인간의 약한 심성. 일이 더디게 진행되거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일단 성질을 부리고 봅니다. 그리고 대개 혼낼 사람을 찾게 되죠. 교회는 경영하는 것이 아닌데 본당을 일종의 위계적 조직으로 내심 받아들이는 경우,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그렇게 비천한 일을 기꺼이 하는 모범을 보여주신 후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보다 높지 않다! 너희는 단지 종일 뿐이다. 너희는 이 일을 하라고 파견된 이들이다.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저는 ‘총론은 지당하신데 왜 하필 나한테 종이라고 하시나’ 그렇게 내심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전 들은 이야기입니다. 신학교 신부님(아주 예전 이야기지요)이 강론 시간에 질문하더랍니다. ‘여러분, 신을 보고 싶으신가요?’ 신학생들은 뜬금없다 했겠죠. 갑자기 웬 신, 하느님도 아니고! 그러더니 그러시더래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십시오. 뭐가 보이나요?’ 신(神)은 보이지 않고 신(shoes)이 보이더랍니다. 속뜻인즉 그렇게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야 하느님도 볼 수 있다 뭐 그런 나름 교훈적 이야기.
자기를 낮추는 겸양은 비굴함으로 비쳐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어쩌나요? 낮추지 않으면, 발을 닦아주신 분을 만날 수 없는 것을. 중심에 있어야 뭔가 이룬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쩌나요? 끝자리에 앉아야 다시 불러 높여주신 다는 것을. 도대체 왜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까지 순종하셔서 높아지려는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시는 것인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거야. 따라 올테면 따라 와봐!’ 그러니 원망스러운 감사함입니다.
낮아지고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법. 매일 연습해도 참 어렵습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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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성공회의 주교가 되기를 꿈꾸었던 사무엘 브랭글이라는 청년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부스 장군은 그의 지원을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그에게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낙심한 브랭글은 속으로 ‘내가 군화나 닦으려고 내 꿈을 좇아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어부들의 발 위로 허리를 굽히시는 모습을 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 주고 있을 때, 인근에 살던 이웃 주민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데레사 수녀는 대답했습니다.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콜롬비아 신학교 스티븐 올포드 박사에게 학생들이 물었습니다.
“저희들에게 크리스천 리더십의 비결이 무엇인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올포드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이요? 무릎을 꿇으십시오.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십시오. 그리고 심장이 깨어져도 참으십시오!”
가장 단순한 진리지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가 있습니다. 받아들임은 낮아짐이란 것입니다. 자신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내가 주님보다 높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손님을 맞이할 때 우리는 손님에게 일을 시킬까요, 아니면 우리가 할까요? 모든 맞아들임은 내가 종이 되는 일입니다. 아기를 맞아들인 엄마는 어떨까요? 태중의 아기를 위해 봉사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제자들을 당신 품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또한 예수님을 높이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산은 물을 담아놓을 수 없습니다.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곡은 산보다 낮으므로 물을 맞아들이고 강은 더하고 바다는 더합니다. 성모님께서 바다와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은총 자체를 맞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주님의 뜻대로 이웃을 맞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주님도 맞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웃들에게 겸손하고 이웃을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섬길 줄 모르면 예수님도 섬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에 발꿈치를 들면 예수님께 발꿈치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은 바로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시작됩니다. 이웃을 섬길 줄 모르면 교회도, 그리스도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16세기 ‘로마의 사도’라 불리는 재속 사제로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한 필립보 네리의 일화입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거룩한 영성으로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녀를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녀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수련 수녀를 오도록 했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 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한 재속 사제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을 벗기라고 하니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시키는 사제를 판단하고는 자신은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녀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와서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궁금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엔 성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안에 맞아들인 주님이 나를 성전으로 만듭니다. 내가 맞아들인 사람들이 나의 열매들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려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내 발밑에는 오로지 나 자신만 있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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