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는 양들의 문이다. - 부활 제4주일 (2020.5.3.)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나는 양들의 문이다. - 부활 제4주일 (2020.5.3.)

by honephil 2020. 5. 3.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에 빗대어 드러내십니다. 그리스 말에 ‘문’은, 안팎을 구분하는 개념의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드나드는 ‘통교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통교하는 문은 안팎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그 자유 안에서 예수님과 신앙인은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서로를 닮아 가며, 서로를 통하여 생명을 공유합니다.


‘문’은 그래서 서로를 향한 ‘길’이 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목적지에 다다르고 그 목적지에서 목자와 양들은 서로 만나 풀밭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길을 벗어나 걷게 되면 힘들고 불편해서 목적지에 다다르기는커녕 자기 존재마저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는 무엇을 해도 안 돼!’ …….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를 탓하며 세상살이마저 내려놓을까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고민의 끝은 결국 자신 안에 갇혀 버리는 외톨이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만든 ‘길’이 아니라 통교와 소통, 그리고 서로를 살찌우는 생명으로 열린 길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려고 떼쓰듯 덤벼드는 완고한 투정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일이 예수님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한다는 것을 자기 삶의 만족이나 욕망의 충족으로 폄훼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용인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앙은 서로의 목소리를 애써 꼼꼼히 듣는 이들의 여유 안에 풍성한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주님, 당신 음성이
낯설지 않은 믿음이게 하소서.
당신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음이게 하소서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
#부활피정 묵상 & 음악 13 - 성소주일, 생명주일
https://youtu.be/-tdSu5eA9x8

 

~~~~~~~~~~~~

#묵상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생명 주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10)

 


소년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토요일 저녁 시간이면 즐겨보던 ’쇼2000‘,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따위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꿈이 생겼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무대를 진두지휘하면서 감동을 주고 즐거움을 불러 일으키는 무대를 만들 거야-하는 꿈이었죠. 소년은 버라이어티 쇼 피디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소년은 동네에 소문난 모범생이었죠. 전형적 엄마 친구 아들이었습니다. 소년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공부를 못할수 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남을 속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호기심을 가질 정도로 착해 빠졌습니다. 소년은 학교-집-도서관 이외에 다른 곳은 얼씬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언론정보학을 공부하고 어릴 적부터 품었던 꿈을 이루려는 찰나에 하느님께서는 N0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리고 그 소년은 하느님의 저항할 수 없는 사랑에 YES 라고 응답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꿈을 이루어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접니다.

성소주일입니다. 더 많은 청소년 젊은이들이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사는 봉헌의 삶에 응답하도록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그 소년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드릴까합니다.


제가 스물 네 살 때까지는 꿈에도 신학교 들어갈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무대 체질이지 제대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제가 하던 스터디 중에 국내 일간지 논조를 분석하는 팀이 있었어요. 일주일에 한번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각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가 공부하는 것이죠. 매일 매일 제가 맡은 신문을 꼼꼼하게 보고 리포트를 한주에 한번씩 써야 하죠. 어느날 열심히 신문을 탐독하는데 기사 하나가 눈에 띕니다. 성가 복지 병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병원입니다. 그 병원은 제 본가 인근입니다 그 병원이 무료자선병원으로 전환합닏. 90년입니다. 초창기라 재정도 어렵고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한데 아직 제대로 체계를 못갖추었을 때죠. 신문 기사는 그 병원에서 당시 제 또래 젊은 친구,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 열심히 봉사하는 장면을 다룹니다. 열심히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땀흘리면서 많은 보람을 느낀다는 인터뷰가 실린 겁니다. 무심히 보다가 참 내 또래인데 장하게 사는 친구일세 그러다가, 시간 나면 한번 가봐야 겠네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그리고 잊어 버리고 있었어요. 그후 한 몇 달 지나 학교에서 집에 가는데 병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심히 버스에서 내립니다. 전에 한번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였죠. 불쑥 들어갔더니 어느 수녀님이 심드렁하게 다 저녁에 오면 어떡하냐고 낮에 오래요. 알았다고 쫓겨났죠. 오기가 생겨 며칠 뒤 다시 갑니다. 수녀님이 일단 환자 챠트 입력하는 것 좀 해보래요. 키보드위를 날아가면서 합니다. 얼마 뒤 주방가서 설거지 하랍니다. 원래 제가 살림꾼이라 엄청 뽀득득하게 딱았죠. 그러더니 창고 정리 좀 해달래요. 손에 딱 달라붙게 잘합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반나절씩 병원 봉사자가 됩니다. 그러고 몇 달 지나 일손이 너무 부족하다면서 전일 봉사 가능하겠냐고 부탁합니다. 거절 못하는 성격, 그러겠다고.


그렇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많이 만납니다. 혼자서 임종하시는 분 곁에도 있어 봅니다. 무의무탁한 이들, 노숙하시는 분들도 만납니다. 시간을 쪼개고 손발을 움직이고 지갑을 열어서 이 세상의 아픈 상처를 싸매는 선한 사마리아 인들도 많음을 새삼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났는지 저 혼자 아무도 모르게 ’내가 사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들키면 절대 안되니까 입밖에도 꺼내진 않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궁리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던 어느 날, 아침 일찍 현관 청소를 하는데 연세 지긋하신 수녀님이 트렁크 들고 바이올렛 화분 두 개 들고 나오시더라구요. 어디 가세요-묻습니다. 소임 이동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신답니다. ’안녕히 가시라‘ 인사하고 저는 하던 일을 마저 하는데, 저만치 가시던 수녀님이 휙 돌아보더니 저보고 그럽니다. ’라파엘, 다음에 첫강복 받으러 올께요.‘ 그러고 그냥 총총 가셨습니다. 등골이 오싹하고 전율이 흐릅니다. 이거 무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신자도 사제의 사자도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하느님께서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 저 수녀님을 움직이셨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난데없이 첫강복 받으러 오겠다니, 어쩐다. 들킨 것은 고사하고 큰일 났습니다. 저 수녀님한테 첫강복 드릴려면 서품 받아야하는데.  후로도 아무한테도 말안하고 혼자서 몰래몰래 준비해서 신학교에 완전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한해 한해가 흘러갑니다. 학년이 올라갔습니다. 4학년이 되었을 때 성소주일. 일년 내내 닫혀있던 신학교 오픈하는 날이라 인산인해로 신자들이 방문합니다. 저도 맡은 일이 있어서 이리 저리 다니는데 저만치서 낯익은 수녀님이 딱 보입니다. 주일학교 친구들 데리고 오신 그때 그 수녀님. 첫강복 받으러 오겠다고 헤어진 뒤 얼마만의 재회.  저는 완전 놀랍니다. 아직 몇 년 더 있어야 첫강복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수녀님은 저보다 몇배 더 놀랍니다. 저를 보더니 그럽니다. ’라파엘, 아니 자기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니. 수녀님 첫강복해야해서 청춘을 다 바쳐서 공부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알고보니 그 수녀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 친구 저친구 죄다 남자는 신학교 가라고 여자들은 수녀원 가라고 습관적으로 그런다고. 그중에 제가 하나 걸려든 것.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이 쓰려는 이를 부르십니다. 그 수녀님은 서품받고 제 부모님 다음으로 첫 강복을 받으셨습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

 

영화 ‘스틸라이프’(2013)는 고독사를 처리해주는 존이라는 한 구청 직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는 고독사 한 사람들을 그가 원했을 법한 종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런데 워낙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기에 그의 일 처리는 매우 더뎠습니다. 고인의 장례식에 와줄 만한 사람의 단서를 찾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느린 일 처리에 짜증이 난 그의 새로운 상사는 22년간 같은 일을 해온 그를 해고하고 새로운 사람을 고용합니다. 새로운 직원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고독사 한 사람들을 재빠르게 ‘처리’합니다.


이제 존은 마지막 일만 처리하면 됩니다. 마지막 대상은 빌리라는 자신의 집 앞에 살았던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를 힘겹게 찾아냈지만, 그녀는 빌리의 장례식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진첩에 있는 딸을 찾아냈습니다. 딸은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그렇게 자신을 찾아와 준 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둘은 아버지 장례 때 만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존은 장례식 전날 교통사고를 당해 말 그대로 고독사를 하게 됩니다. 존은 아무도 와주지 않는 장례식을 끝으로 재빠른 일 처리를 하는 직원에 의해 매장됩니다. 그 옆에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존을 기다리는 빌리의 딸과 몇 명의 사람들이 다행히도 빌리의 장례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존의 주위로 그동안 그가 장례를 치러주었던 모든 고독사 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추도를 해 줍니다. 존은 세상에서 혼자였지만 천국에서는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주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목자는 자기 양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어서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 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 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아이들처럼, 결점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말해줍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단점을 덮어주셨고 우리는 그 희생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문이라고 하십니다. 목자는 양우리에 이미 있는 양 중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이 이름을 지어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있는 양들을 아드님을 통과하여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파견받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아버지께 가는 문이 되십니다. 문은 양들을 보호하고 또 참 목자에게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들을 봉헌하는 문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목자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이지만 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파견되어 양들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목자가 양우리에 도착하였지만, 문지기들은 목자를 죽였습니다. 양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파견받은 목자들입니다. 자신의 우리에 양들을 잘 모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칫 양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도둑이 되고 맙니다. 도둑을 조심하고 또 도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파견받은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이 되어주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있는 양들을 데리고 나를 밟고 아버지께로 가시게 만드는 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깊은 산속에 거미 한마리가 오랫동안 친구 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거미줄을 보니 이슬 한 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넌 누구냐?”

“난 이슬이야!”

거미는 오랫동안 친구가 없던 차에 “우리 친구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슬은 잠시 생각하다가 “응 그래 좋아.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나를 절대로 만지면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거미는 약속 지킬 것을 이슬에게 맹세했습니다. 그 후 거미와 이슬은 행복을 만끽하면서 외로울 땐 서로 위로하고 즐거움을 서로 나누었고, 세월은 흘러 거미는 이슬이 없는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미는 이슬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거미가 용기를 내어 “나 너를 한번 만져보고 싶어 응?”하고 말했습니다.

이슬이 슬픈 표정으로 “너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럼 너 나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해야해. 만약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거미는 “응!”하고 말했습니다.

거미가 두 손으로 이슬을 꼬옥 껴안는 순간 이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파견되었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파견받았음을 잊으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도둑이 됩니다. 주님께 봉헌하는 부모라야 참 목자요 주님께서 드나드는 문이 됩니다.


우리는 참 목자에게 닫힌 문입니까, 열린 문입니까?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께서 통과하게 하지 않는 목자는 모두 닫힌 문입니다. 문은 마치 혈관처럼 자신이 커지면 닫힙니다. 우리는 참 목자를 자신이 얼마나 목자에게 열린 문인지를 보며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이슬처럼 여기고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51r4LDCUEEc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