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20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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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2020.4.25.)

by honephil 2020. 4. 25.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또한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일했으며(1 베드 5,13),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카이사리아에 있는 회당 앞에서 이교도들의 제사가 행하여지자, 이에 분노한 유다 최고 의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이교도의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 제국은 유다인들의 저항에 잔인하게 대응합니다. 성난 유다 군중이 안토니아 요새를 습격하였고, 로마군은 마침내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트리고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누명을 쓰게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로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합니다.


성전을 잃은 유다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결별하여 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였고, 로마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로 그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바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합니다. 마르코는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찾아온 베드로를 만나 그의 마지막 생애에 아들로서, 시종이며 통역관으로 함께하였습니다. 또한 사촌 바르나바의 소개로 함께 복음 선포 여행을 하였던 바오로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해 주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 글로 남긴 복음사가가 마르코입니다. 그리고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글로 전한 교회의 첫 복음서가 마르코 복음입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마르 8,29; 15,39 참조) 담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으로 복음서의 제목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풀이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참조).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며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살피고자,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스스로 물어야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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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일들 앞에서
사랑 속으로
숨지 말 것

또한 
사랑 앞에서
시대의 일들 속으로
숨지 말 것

- 에리히 프리트의 詩, ‘숨지 말 것’

한 생애를 사는 동안
겪는 시대의 길에서
성실과 열정을 다해야할 소명,
저희 삶에 담아주신 주님!

믿음은 언젠가
묵묵히 최선을 다하였는가,
미움을 지우고 사랑하였는가의
답을 준비하는 여정이게 하소서.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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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주신 말씀
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마르 16,15-20ㄴ)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최후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보통 이 말씀을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부릅니다. ‘Great Commission’입니다. 마태오 복음 28장에도 나오죠. 한자로 보지 않았을 때 저는 至上이 아니라 地上이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이라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을 그렇게 부르나보다 했죠. 그래서 속으로 그러면  천상명령도 따로 있나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자로 지상(地上)이라는 것을 알고 영어로 Great였다는 것을 알고 약간 충격을 받았죠. 아, 이 말씀이 예수님이 남겨주신 최고의 명령이란 뜻이였구나.

뭐가 최고의 명령입니까? 지상 명령의 핵심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죠. 이 선교 사명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남겨질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윤리적인 삶을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착하게 살아라, 정직하게 살아라. 올바르게 살아라.’ 윤리를 남기신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 선교라는 사명을 남기셨던 것이죠. 선교, 복음 선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선교만 잘하면 뭐하냐 인품이 덜 되었는데! 선교만 잘 하면 뭐하냐며 선교하는 이들에게 비아냥거리며 ‘너나 온전한 인격을 가지고 계세요’  은근히 그렇게 비난합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에는 뭔가 모자라는 인간이라는 평가입니다.


왜 이런 일견 정당해보이는 비난을 할까? 신앙을 자기 수양 내지 인격 도야 정도로 착각 혹은 오해하기 때문인 듯 싶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리스도교는 자기 수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예상과 달리 자기를 가꾸고 다듬는 종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수련과 수도의 종교가 아닙니다.

보통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징 내지 본질을 계시 종교라고 합니다. 그 말인즉 주님께서 가르쳐주고 보여주신 대로 그대로 믿는 것 그리고 따라가는 것이란 뜻입니다. 수양과 수련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필요하지만 자기 수양과 수련에 빠져서 믿음은 윤리적인 변화, 인품의 성숙 정도로 여기면 안된단 뜻입니다.


신앙은 항복입니다. 신앙은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란 것이죠. 그러나 자기 수양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내가 집중력을 가지고 의지를 동원하면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죠. 어떤 것을 골똘하게 생각해서 부족한 부분을 도야하고 채워서 마침내 나의 인품과 자질, 인간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자기 수양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서 출발합니다. 부정적인가요? 뭐 그렇게 볼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나의 전적인 무능의 인정, 여전히 죄인 그대로란 고백, 나를 바꿀 수가 없다는 탄식, ‘주님, 아무리 해도 나를 변화시킬 수가 없어요’하는 부르짖음, 내 한계에 부딪쳤다는 현실 자각- 이것이 신앙인 것이죠.

이렇게 항복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시키는 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굴종적인가요. 그런데 하느님 앞에 항복하여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면복입니다. 주님 앞에 항복했습니다. 그 이후 반응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될 밖에요.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삶, 가장 행복한 삶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


어릴 적에는 이거하라, 저거하라하면 통제받는단 생각에 짜증이 났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이거해라 저거해라, 너무 억압적이라고 여겼죠. 하여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얼른 서품받아야지. 그랬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하고 싶은 것을 별로 눈치보지 않고 할 수 있는 나이도 위치가 되었어요. 그런데 더 부담이 됩니다. 차라리 시키는 대로 살던 때가 괜찮지 않았나, 그것이 꽤나 행복했다는 새삼스러움.

책임을 지는 것은 무서운 것, 부담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려고 할수록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나를 얽어맵니다. 어디 식당에 갔는데 ‘신부님, 여기 우린 처음 와서 잘 모르고 고르기 힘드니까 알아서 시켜 주세요.’ 이거 괴롭습니다. ‘야, 이걸 뭘 시켜야 하나’ 부담 백배. 그런데 기껏 시켰더니 내가 시킨 게 맛이 있네 없네, 뭘 이런 걸 시켰냐는 야릇한 눈길이라니. 돈도 내가 내고 책임도 내가 지고 욕도 내가 먹고. 참, 책임지는 자의 괴로움이란 그렇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항복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갈수록 알게 됩니다. 시키시는 분이, 명하시는 분이 다름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면 더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걸 모르고 당신이 하느님이면 하느님이지 왜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었으니 참 우리도 한심하지 않나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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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Alt28VWas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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