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독서는 예루살렘에 있던 초기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해 주며, 그 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복음에 충실하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완벽하게 복음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보다는,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려면 본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시하려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먼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물질의 나눔’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합법적인 재산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으며 온전히 자기 결단에 따라 각자의 재산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내놓았습니다. 그 나눔을 실천하는 바탕에는 “한마음 한뜻”이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한뜻’은 단순한 친구 사이의 공유를 넘어 믿는 사람들 곧 신자들의 공통적인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히브리식 개념인 ‘한마음’이 더해집니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기도의 시작을 알려 주는 표지로 ‘한마음’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주님과 이루는 일치와 구성원 간의 친교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기도할 때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야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을 보면, 세속적인 개념의 차원에서 물질 그 자체에 얽매여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코데모가 등장합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그 외 아드님 예수님에 대한 우리 믿는 이들의 한마음 한뜻이야말로, 물질을 넘어 친교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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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
선문답처럼 들려주시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인식하고자 논리를 따지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주님,
한 번 당신께 묻고 싶던 것들은
더러 당신을 향한 저항이었고
제가 살아온 삶의
바른 대가가 아님을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에 실려 간
헤아릴 수 없는 기도는
결국 자신을 향한
독백이었음을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이제 저희
당신께 마음을 열고
제 독백의 하소가 아닌
더 정겹고 성숙한 기도로
내면의 향기를 담는
믿음의 순례자이게 하소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
이제 삶의 순풍과 역풍을 받아들이며
모진 바람이 부는 날에도
당신은 저와 함께 하시며
저희 사랑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봄바람에 미소 짓는 믿음이게 하소서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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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화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7ㄱ.8-15)
성령과 구원에 관한 중대한 말씀입니다. 니코데모에게 신학자들이 붙인 별명은 ‘예수님의 위성’입니다. 근래 ‘위성’이란 말이 정치 영역에서 회자되었었죠. 위성 정당! 본 정당을 중심으로 한 연결 되어있지만 별도인 정치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니코데모를 ‘위성’이라 부른 이유는 그가 중심인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그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던 것을 비유합니다. 주님 주위에 빙빙 돌았던 배회했던 인물이란 뜻입니다. 믿긴 하지만 삶 전체가 변화되지는 못했기에 그렇습니다. 그가 밤에 주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예수님 십자가 이후 주님을 매장하는 자리에 옵니다. 복음은 니코데모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현재 그는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배경을 보고, 그 기적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적의 유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충분한 증거는 아닙니다. 왜냐면 기적이나 표징 자체는 그리스도교 밖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비 현상은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놀라워하지 않는다. 니코데모의 당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듣고서도 ‘너 믿음이 있다. 신학적 기준이 높다’하시지 않고 오히려 ‘진실로 말한다....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며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위로부터 나는 것, 위로부터 나는 영적인 출생을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곧 과거와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거듭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거듭남이람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위로부터 나고 새로 나고 거듭나는 것(新生, 重生, 再生)입니다.
그런데 이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는 바람 같다고 하시죠. 무슨 뜻일까요? 누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역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곧 인간에게 달린 일이 아니란 뜻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대 유다교의 신학적 확신이었습니다. 혈통적 구원과 율법적 구원이라는 확신입니다. 혈통과 율법 준수, 이 두 가지만 딱 보면 얘는 구원받은 사람 저 놈은 구원 못 받은 사람, 딱 정해져 있다는 것이죠.
우리 아버지 이스라엘 사람이야! 나 아무개 가문 자손이야. 그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단지 육에 지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인즉 결국 당신 구원 여부가 우리 아버지가 누구냐에 달려 있다는 판단은 헛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알다시피 그것은 너무 협애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육에 의한 구원, 율법에 의한 구원이라는 관점은 불행한 99%와 다행스럽게 유다인으로 태어나 율법에 철저할 수 있었던 나머지 1%로 세상을 양분시킵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점을 배격하실 뿐 아니라 혐오하셨던 것이죠.
복음에서 구원의 유일한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고백은 다름 아니라 위로부터 나고 다시 나고 새로 난 결과입니다. 곧 믿음으로 인해 새로난 것이 아니라 새로남 자체가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이것이 구분되시나요. 선행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새로 나게 하심인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구원의 출발은 인간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람이 불고 나서야 바람을 아는 것이죠. 주님을 믿겠다고 고백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미 선재된 것은 그렇게 고백하게 하는 성령의 작용이 있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고백과 행동, 삶의 변화는 확인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만들어놓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확인되는 것일 따름입니다. 봄이 와서 꽃이 핀 것입니다. 꽃이 피었으니 봄이 와야 하는 것이 아니죠. 곧 하느님의 주권 영역 안에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묶여 있는 백성들 피폐하게 사는 백성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제는 혈통이나 율법에 의한 구원 끝났다는 것이죠.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기에, 혈통과 율법에 의한 구원 그것은 주님께서 수용하실 수 없는 것이니 구원을 그렇게 독점시킬 수 없다는 것이죠. 모두를 하느님께서 살리시기 위해 아들을 이 세상에 주셔서 그 이름을 걸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삶은 변화됩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믿음과 고백이 우리를 변화의 삶으로 이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은 변화되려고 발버둥 치는 것, 이제 아닙니다. 먼저 감싸시는 바람 같은 성령에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이죠.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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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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