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도끼를 잃어버린 사람이 도끼를 찾다가 보이지 않자 이웃집 아이를 수상하게 여깁니다.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터인데 머뭇거리고 아이의 행동만 살핍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심증이 들자 날이 밝으면 따지겠다고 벼르며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잃어버린 도끼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아이를 다시 보니 수상쩍은 데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의심암귀’(疑心暗鬼) 곧 의심이 깊어지면 귀신이 보인다는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보고 유령 곧 귀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사실 부활 이전에도 제자들은 스승을 유령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심한 풍랑으로 배가 파도에 뒤덮이려 할 때였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의심을 없애시고자 최후의 만찬 때처럼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의심 많던 제자들의 변화는 오늘 독서에서 나오듯 그들의 굳은 믿음으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사랑의 성찬례인 미사에 더욱 열정적으로 참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주신 말씀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35-48)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가 살아서 돌아다닌다더라, 신출귀몰하게 여기저기 나타난다더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불안, 두려움 그리고 기이함이었습니다. 애초에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은 차츰차츰 그 불안과 두려움과 기이함에서 벗어납니다. 그 다음에 보인 반응은 기쁨과 희망,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용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었음을 힘차게 증언하고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신앙인의 영적인 여정의 단계를 축약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기이함에서 출발하여 기쁨이 샘솟고 희망이 자라나고 용기가 스며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제 증언과 선포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특히 엠마로로 가는 도중, 부활하여 발현하신 주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식사까지 함께 한 두 제자의 증언은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확인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그들의 증언을 들은 이들은 부활의 확신을 더 깊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가 이제 율법의 기록, 역사의 축적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생명의 말씀임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것, 그 핵심에 부활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활 후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발현하시는데 오늘 복음의 대목이 제일 리얼하고 섬세한 듯 싶습니다. 제자들에게 손발의 못자국을 직접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제자들과 생선을 드시기도 합니다. 다른 발현이 그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정도로 간략한데 비해 상당히 세세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시는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전에도 늘 자상하셨던 예수께서는 더한 자상한 면모를 보이시면서 제자들에게 뜨거운 당신의 사랑을 체험하도록 안배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이, 즉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며 자신을 희생하면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할 사명을 받을 사도들에게 정신적 무장과 영적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체험이 먼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깊이 사랑받는다는 내적인 확신이 그들에게는 증언과 선포의 합당한 준비가 됩니다. 그런 사도들로 인해서 오늘날의 우리들도 믿음으로 그 체험을 사도들과 더불어 공유하게 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받음의 체험이 불안과 두려움과 기이함에서 시작하지만, 기쁨과 희망과 용기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증언과 선포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
2020년 가해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성경은 믿음을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복음: 루카 24,35-48
오늘도 어제에 이어 성경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심으로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사도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당신이 육체를 지니고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서 예수님은 생선토막을 드시며 참으로 육신으로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다음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 말씀을 이해시키십니다. 그러자 그들도 부활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활을 믿게 하신 다음에 생선토막을 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부활을 믿게 하신 다음에 그 믿음을 성경을 통해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 믿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헛갈려서는 안 되는 것이 믿음이 성경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지, 성경이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로운 믿음을 준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이르게 한다고 믿는 데서 모든 이단과 사이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로마에서 성서학을 배우는 최고의 대학인 비블리꿈 조교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하는 포르투갈 사제였는데, 그는 제가 성경을 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것을 알고는 교의 신학적인 선입관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리에 대한 믿음이나 선입관 없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연구할 수 있어야 올바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모든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를 탈출시킨 것은 이집트 백성이 나쁜 이들이었기 때문이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으니 그는 바오로 전공이 아니라 모른다고 했습니다.
코린토 전서 10장 1절 이하에 보면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생명의 양식으로, 생명의 물을 쏟아내는 바위는 그리스도로 해석을 합니다. 이는 바오로가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의 교리라는 선입관’이 생겨 이전의 눈의 비늘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선입관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했다가는 메마른 역사 공부에 머물게 됩니다.
성경은 교회의 믿음에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의 믿음에 저항하기 위해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언가 주장하려면 근거로 삼을 것이 있어야 하는데, 교리는 안 되고 성경을 진리라 믿게 만들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믿어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첫 공의회를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아리우스 이단은 성경의 ‘지혜’를 그리스도로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라는 그들의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창조 때부터 하느님을 도왔던 첫 피조물인 지혜를 그리스도라 주장하여 교회가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과 함께 걷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의 사제가 됩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떨고 있는 그에게 교회가 말하는 속죄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에게 빛을 주었습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에 꽂힌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 계단 성당에서 무릎으로 속죄하며 오르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걸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라는 기치를 걸고 교회에 저항합니다. 그 구절은 믿었지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며 교회에 죄 용서의 권한을 준 구절은 무시했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 서간도 처음엔 성경에서 제외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자유자재로 해석하여 개신교에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종파만 200여 개가 넘습니다. 각자 성경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여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믿는 것이 다른 것이고 그래서 각자 성경이 다르게 해석되는 것뿐입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진리라고 믿고 있어서 신천지의 성경공부에 쏙 빠집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공부를 해서 그 믿음에 다다르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렵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에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천국처럼 따듯하게 해 주기 때문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곳이라면 천국이겠고, 또 그렇게 해 주는 이만희가 새로운 구세주라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자체로 진리라고 믿으면 절대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주입하는 그 집단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 가르치는 사람들의 믿음을 주입시키는 수단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미 믿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 이웃에게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믿게 하시고 그것을 성경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믿는 것이지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가톨릭교회만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찾기 위해 성경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 성경이 없어도 교회는 굳이 성경에 의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진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신약성경도 편집하게 된 것입니다.
시골 할머니의 신앙이 성경 박사보다 클 수 있는 이유는 그분들은 성경으로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큰 진리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먼저 눈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비늘이 떨어졌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지금 더 시급한 것은 성경공부가 아니라 가톨릭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심판이나 지옥, 교회에 대한 믿음도 온전하지 않으면서 성경공부를 해봐야 또 다른 이단적 생각만 깊어지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을 먼저 믿게 하시고 그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성경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교회이고 교회의 가르침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믿는 진리를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유용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천개의 바람이 되어 (세월호 6주기) COVER 욱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