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루카 2,22-40) -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20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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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루카 2,22-40) -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2026.2.2.)

by honephil 2026. 2. 2.

[묵상]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루카 2,22-40) -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2026.2.2.)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무리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복음 권고의 서원으로 주님께 축성받아 자신을 봉헌한 축성 생활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축성 생활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회의).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 봉헌의 목적; 나를 잊음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날이자, 우리 자신의 초를 축복하며 봉헌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봉헌'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물건을 바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봉헌은 곧 '축성'입니다. 내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신비로운 교환입니다.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에 나오는 '거지와 왕' 이야기는 이 진리를 아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마을에 황금 마차를 탄 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왕이 자선을 베푸시면 내 가난도 이제 끝이겠구나!" 그런데 마차에서 내린 왕은 오히려 거지에게 손을 내밀며 뜻밖의 말을 합니다.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거지는 당황했습니다. 줄 것을 기대했는데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자루를 뒤적거려 가장 작은 쌀알 한 톨을 꺼내 왕에게 주었습니다.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자루를 비우던 거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쌀더미 속에서 쌀알만 한 황금 조각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지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아, 내가 가진 것을 몽땅 털어 드렸더라면, 이 전부가 황금이 되었을 텐데!"

 

봉헌은 하느님께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내 것을 드리고 무한한 하느님의 것을 돌려받는 거룩한 투자인 셈입니다. 우리가 아까워서 조금만 드린다면, 우리는 딱 그만큼의 축복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봉헌이 축성이 될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를 알렸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온 우주와 천사들이 숨을 죽이고 한 시골 처녀의 입술을 바라보았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허락을 기다리시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자궁에 강제로 잉태되신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이 몸에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자신을 봉헌하며 문을 열어드렸을 때, 비로소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제 삶에 오소서"라고 봉헌할 때, 우리 인생에도 똑같은 강생의 신비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주 봉헌금을 내고 기도를 바치는데도, 왜 내 삶은 거룩하게 축성되지 않는 것 같을까요?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귀한 자유를 주시고 자신을 잊을 만큼 겸손해지시는데, 정작 우리는 봉헌한다고 하면서도 내 것을 꽉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이나 쌀알이 아닙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내 손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음악의 성인 베토벤이 제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 앞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깨와 손가락에 힘을 꽉 주고 건반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제자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으려다 멈추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힘을 빼지 않으면, 내가 너를 도울 수 없다."

 

제자가 깊은숨을 내쉬고 손에 힘을 빼며 스승에게 손을 맡기자(봉헌), 베토벤은 제자의 손을 이끌어 비로소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건반을 꽉 쥐고 있으면 하느님은 연주하실 수 없습니다. 내 힘을 빼고 그분께 손을 맡기는 것, 그것이 봉헌이며 그때 내 인생은 명곡으로 축성됩니다.

 

골프나 검도 같은 운동을 배우러 가면 코치들이 입이 닳도록 하는 말이 있습니다. "회원님, 어깨에 힘 좀 빼세요. 힘 빼는 데만 3년 걸립니다."

 

초보자는 잘하고 싶은 욕심에 온몸에 힘을 줍니다. 그러면 공은 빗나가고 칼은 무거워집니다. 반면 고수는 마치 채를 던지듯이 툭 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어야지, 내가 봉사를 완벽하게 해야지" 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하느님이 쓰시기에 너무 뻣뻣합니다. 하느님이 휘두르시는 대로 휘둘리는 유연함, 나를 잊은 그 부드러움이 영적 고수의 경지입니다.

 

영화 '샤인'의 실제 모델인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라는 악마적인 난곡을 완벽하게 연주해야 한다는 강박과 아버지의 압박 속에 정신 분열을 겪고 무너졌습니다. 그는 악보 하나하나를 정복하려다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되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잘 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웅얼거리며,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저절로 춤추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연주는 내가 하는 게 아니야. 그냥 음악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거야."

 

자신의 기교를 뽐내려는 자아를 잊고 음악의 신에게 손을 맡겼을 때, 사람들은 그의 연주에서 전에 없던 전율을 느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가장 완전한 봉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를 잊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지, 내가 얼마나 거룩한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을 잊고 우리에게 오시는 분을 맞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잊는 일이 봉헌입니다.

 

중세의 아름다운 전설 『성모님의 곡예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한 곡예사는 라틴어 기도도 모르고 학식도 없어 늘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른 수사들이 멋진 성가와 필사본을 봉헌할 때, 그는 아무도 없는 밤에 성당으로 들어가 성모상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곡예'를 했습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물구나무를 서고 공을 굴렸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거룩한 성당에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기도를 모른다는 사실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잊을 만큼 몰입했습니다. 오직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원장 수사가 "이런 신성 모독이 있나!" 하며 야단치려 뛰어들 때였습니다. 놀랍게도 성모상이 움직여 내려오더니, 자신의 푸른 베일로 땀 범벅이 된 곡예사의 이마를 닦아주었습니다.

 

우리가 봉헌해야 할 가장 귀한 제물은 쌀알도, 황금도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잘나고 싶다는 욕심,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고집, 이 모든 힘을 빼고 나를 잊어버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땀을 닦아주시고 우리 인생을 황금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 모두 어깨에 힘을 뺍시다. 그리고 나를 잊고 오직 그분만을 바라봅시다.

 

아멘.
https://youtu.be/cJi_9i6c9n8?si=URZ7H19oklVfAHxF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

Mary and Joseph took Jesus to present him to the Lord. Lk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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