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일)_25 ] 새롭고 신나게 성공하는 하루 |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 10월 ]
< 1주 차 : 9.28 ~ 10.4,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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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여러분,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그 출발점에는 단 한 사람, 바로 이벽이 있습니다.
그의 삶은 화려한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길은 오직 박해와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운악산 자락,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이곳에는 '조선 천주교의 첫 불씨'라 불리는 이벽을 기리는 성지가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벽과 천진암의 이야기를 따라
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천진암, 신앙의 발상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이곳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 불립니다.
1777년 무렵부터 이벽은 이승훈,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과 함께 모여 서학을 연구했습니다.
권철신 같은 저명한 학자도 종종 합류했지요.
그들은 단순히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학문 차원의 '천학'을 종교적 신앙으로 끌어올렸고,
주일을 제정해 지키며 기도와 십계명을 실천하는 '신앙 훈련의 도장'을 만들었습니다.
젊은 선비들은 이벽을 웃어른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천학총림'이라는 신앙 공동체를 결성했습니다.
이곳에서 이벽은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전했고,
천문학, 지리학, 수학 같은 신문학까지 가르쳤습니다.
훗날 정약용은 이곳에서 배운 학문과 사상을 토대로 정조대왕을 도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천진암은 단순한 산속 암자가 아니라, 조선 지성인들의 '신앙의 학교'였습니다."
세례와 교회의 탄생
"1783년, 선비들은 결심합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 직접 세례를 받아오자.'
그 사명은 맡은 이는 이승훈이었습니다.
1784년 봄, 그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곧 이벽도 세례를 받으며 학자의 길을 접고
복음의 전도사로 삶을 바꿨습니다.
그는 양반과 중인, 심지어 천민까지 가리지 않고 신앙을 전했습니다.
김범우, 정약용, 권철신...
수많은 이들이 그의 손에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천진암에서 싹튼 작은 모임은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으로 옮겨가며 본격적인 '한국 천주교회'로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박해와 순교
"하지만 새로운 믿음은 곧 조선의 질서를 위협하는 '사학'으로 낙인찍혔습니다.
1785년 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다 발각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었습니다.
이벽 역시 고향으로 숨어야 했지만, 끝내 피하지 못했습니다.
1785년 8월 9일, 그는 겨우 32살의 나이로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으나, 1970년대에 발견되어 천진암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은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교황의 선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시작은 전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입니다.
1779년부터 1835년까지,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 스스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자라 불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이벽이 있었습니다."
인물 조명
"그렇다면 이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성호 이익은 어린 이벽을 보며 '큰 그릇이 될 아이'라 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언변은 강물처럼 흘렀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학자였고, 선각자였으며,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의 천 번째 불씨였습니다."
마무리
"오늘날 천진암과 화현 성지는
이벽과 젊은 선비들의 믿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심은 작은 씨앗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함께 자라
오늘 한국 천주교의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화현의 바람 속에서 들여오는 이벽의 목소리---
'진리를 따르라, 믿음을 굳게 지켜라.'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여러분,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그 출발점에는 단 한 사람, 바로 이벽이 있습니다.
그의 삶은 화려한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길은 오직 박해와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벽과 천진암의 이야기를 따라
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천진암, 신앙의 발상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이곳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 불립니다.
1777년 무렵부터 이벽은 이승훈,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과 함께 모여 서학을 연구했습니다.
권철신 같은 저명한 학자도 종종 합류했지요.
그들은 단순히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학문 차원의 '천학'을 종교적 신앙으로 끌어올렸고,
주일을 제정해 지키며 기도와 십계명을 실천하는 '신앙 훈련의 도장'을 만들었습니다.
젊은 선비들은 이벽을 웃어른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천학총림'이라는 신앙 공동체를 결성했습니다.
이곳에서 이벽은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전했고,
천문학, 지리학, 수학 같은 신문학까지 가르쳤습니다.
훗날 정약용은 이곳에서 배운 학문과 사상을 토대로 정조대왕을 도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천진암은 단순한 산속 암자가 아니라, 조선 지성인들의 '신앙의 학교'였습니다."
세례와 교회의 탄생
"1783년, 선비들은 결심합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 직접 세례를 받아오자.'
그 사명은 맡은 이는 이승훈이었습니다.
1784년 봄, 그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곧 이벽도 세례를 받으며 학자의 길을 접고
복음의 전도사로 삶을 바꿨습니다.
그는 양반과 중인, 심지어 천민까지 가리지 않고 신앙을 전했습니다.
김범우, 정약용, 권철신...
수많은 이들이 그의 손에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천진암에서 싹튼 작은 모임은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으로 옮겨가며 본격적인 '한국 천주교회'로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박해와 순교
"하지만 새로운 믿음은 곧 조선의 질서를 위협하는 '사학'으로 낙인찍혔습니다.
1785년 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다 발각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었습니다.
이벽 역시 고향으로 숨어야 했지만, 끝내 피하지 못했습니다.
1785년 8월 9일, 그는 겨우 32살의 나이로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으나, 1970년대에 발견되어 천진암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은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교황의 선언
"1984년, 요한 바오리 2세 교황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시작은 전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입니다.
1779년부터 1835년까지,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 스스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자라 불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이벽이 있었습니다."
인물 조명
"그렇다면 이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성호 이익은 어린 이벽을 보며 '큰 그릇이 될 아이'라 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언변은 강물처럼 흘렀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학자였고, 선각자였으며,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의 천 번째 불씨였습니다."
마무리
"오늘날 천진암과 화현 성지는
이벽과 젊은 선비들의 믿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심은 작은 씨앗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함께 자라
오늘 한국 천주교의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화현의 바람 속에서 들여오는 이벽의 목소리---
'진리를 따르라, 믿음을 굳게 지켜라.'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천진암은 한국천주교회 창립 주역 이벽이, 1770년부터 1784년까지 학업과 수도에 전념하던, 이벽의 독서처와 청학당, 천학도장이 있던 곳으로, 1777년 경부터는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이 모여 함께 천학을 연구 실천하였으며, 때로는 권철신 같은 당시 저명한 학자들도 참석하는 천주교 교리연구와 실천의 청학회도 종종 열어서, 학문적 수준에 있던 천학을 종교적 신앙차원으로 승화시켜, 천주교 기도와 십계명 준부를 위해 음력으로 주일을 제정하고 지키는, 천주교 신앙훈련의 도장이 있던 곳입니다. 이벽은 천진암 천학도장에서 젊은 선비들에게, 천주교를 가르치고, 천문한, 지리학, 수학, 역할, 기하원본 같은 신문학도 가르쳐, 여기서 이벽에게 공부한 정약용은 훗날 정조 대왕을 도와 우리나라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게 된다. 천진암은 정약용이 주로 10세 전후부터 20세 전후까지 자주 와서 머물고, 늙어서는 65세 때에도 찾아와 며칠씩 머물던, 모교이기도 하다.
젊은 선비들이 모여서, 이벽을 웃어른으로 모시자, 이벽은 문하생들에게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서 받아쓰게 하고, 선비들은 천학총림(天學叢林)이라는 천주교 신앙단체를 결성하였으며, 1783년 말에는 새로 개종하여 입교한 선비들과 합심하여, 북경 천주교회로 이승훈 진사를 대리자로 파견하였고, 1784년 봄 그가 2월에 영세를 받게 한다. 이승훈이 귀국한 후 그 해 음력 4월 중순 서울 수표동의 이벽의 자택으로 본부를 옮겨, 전교를 위한 집합소를 만들게 된다. 이는 곧 천진암이 바로 한국천주교회 신앙운동의 발상지이며, 본거지요, 한국천주교회의 탄생지였던 것이다.
1785년 봄 수표동에서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의 집으로 옮겨 더욱더 천주교를 전파하자,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1885년 말까지 100년간의 잔혹한 박해중에도, 천진암에서 갓 태어나 서울로 올라간 한국천주교회는 피를 뿌리며 자랐으며, 목숨을 바치며 살아왔으니, 천진암에서 출발한 젊은 선비들의 신앙단체가 오늘의 천주교회로 성장하는 데 있어 교회 창립의 터전이 되었다.
이렇듯 천진암 성지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앙이 움트고, 천주교회 신앙활동의 싹이 돋은, 신앙의 고향이며, 사람과 장소와 명상에 있어, 즉 유(儒)·불(佛)·천(天)이 합류하여 새 종교사가 이루어진, 우리 겨레 정신문화의 특징이고, 우리나라의 자랑이며, 한국천주교회의 뿌리요, 얼굴이다.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여러분,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그 출발점에는 단 한 사람, 바로 이벽이 있습니다.
그의 삶은 화려한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길은 오직 박해와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벽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야기의 시작
"운악산 자락,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이곳에는 '조선 천주교의 첫 불씨'라 불리는 이벽을 기리는 성지가 서 있습니다.

1799년, 눈 내리던 겨울밤.
젊은 학자들이 천진암에 모였습니다.
정약전, 권철신, 그리고 이벽.
그들은 밤새 서학 서적을 읽고, 세상에 없던 새로운 진리를 토론했습니다.
그 순간, 한국 땅에 천주교 신앙의 첫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세례와 전도
"몇 해 뒤, 이벽은 친구 이승훈에게 당부합니다.
'북경에 가면, 서양 선교사를 찾아 세례를 받아라.'
이승훈은 정말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됩니다.
곧 이벽도 세례를 받으며, 학자의 길을 접고 복음의 전도자로 나섭니다.
이벽은 양반, 중인, 심지어 천민까지...
누구든 만나면 신앙을 나누었습니다.
김범우, 정약용, 권철신, 수많은 이들이 그의 손에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박해의 시작
"하지만 새로운 믿음은 곧 조선의 질서를 흔드는 위험한 '사학'으로 낙인찍혔습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
몰래 모여 기도하던 신자들이 발각되어, 조선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이벽은 고향으로 숨어야 했지만, 끝내 피하지 못했습니다.
순교
"1785년 8월 9일.
이벽은 겨우 32살의 나이로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으나, 1970년 발견되어 천진암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은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교황의 선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103위 순교 성인의 첫 대축일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시작은 전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합니다.
1779년부터 1835년까지, 무려 56년 동안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스스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마땅히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자라 불려야 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이벽이 있었습니다."
인물 조명
"그렇다면, 이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성호 이익은 어린 이벽을 보며 '큰 그릇이 될 아이'라 했고
다블뤼 주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언변은 강물처럼 흐른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학자였고, 선각자였으며,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불씨였습니다."
마무리
"오늘날 화현 성지는 이벽의 희생과 믿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그가 심은 작은 씨앗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함께 자라
오늘 한국 천주교의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화현의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이벽의 목소리.
'진리를 따르라. 믿음을 굳게 지켜라.'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여러분,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그 출발점에는 단 한 사람, 바로 이벽이 있었습니다.
그이 삶은 영광이 아니라, 오직 박해와 순교의 길이었죠.
오늘, 우리는 이벽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운악사 자락,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이곳에는 '조선 천주교의 첫 불씨'라 불리는 이벽을 기리는 성지가 서 있습니다.
1779년, 눈 내리던 겨울밤.
젊은 학자들이 천진암에 모였습니다.
정약전, 권철신, 그리고 이벽.
그들은 밤새 서학 서적을 읽고, 세상에 없는 새로운 진리를 토론했죠.
그 순간, 한국 땅에 천주교 신앙의 첫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몇 해 뒤, 이벽은 친구 이승훈에게 말합니다.
'북경에 가면 서양 선교사를 찾아 세례를 받아라.'
그리고 정말로, 이승훈은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됩니다.
곧 이벽도 세례를 받으며, 학자에서 복음의 전도자로 삶의 길을 바꾸게 됩니다."
"이벽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양반도, 중인도, 심지어 천민까지.
김범우, 정약용, 권철신...
누구든 만나면 신앙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믿음은 곧 조선의 질서를 흔드는 '사학'으로 낙인찍혔습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 모임을 하던 이들이 발각되면서,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이벽은 고향으로 숨어야 했지만, 끝내 피하지 못했습니다."
"1785년 8월 9일,
겨우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이벽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으나, 1970년 발견되어
천진암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성호 이익은 어린 이벽을 보면 '큰 그릇이 될 아이'라 했고,
다블뤼 주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언변은 강물처럼 흘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학자였고, 선각자였으며,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불씨였습니다."
"오늘날 화현 성지는,
이벽의 희생과 믿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그가 심은 작은 씨앗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함께 자라
오늘 한국 천주교의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화현의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이벽의 목소리.
'진리를 따르라, 믿음을 굳게 지켜라.'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ㅇ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처음 시작한 것은 전 세계 교회역사상 유일한 경우다.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성직자 없이,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자신들의 조국에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희생하며 목숨을 바쳤으니,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한다.
<로마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1984년 10월 14일 (주일) 오전 11시에 거행된,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첫 대축일 미사 강론 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공식 선언. 교황청과 한국, 프랑스의 모든 추기경, 주교들 외 2만 5천여 명 신도 참석>
- 한국 천주교 교회 탄생지 천진암 성지 기념비 (1993.9.21.)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화현 이벽 성지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운악산이 바라보이는 자리에는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진 이벽(세례자 요한)을 기리는 성지가 있습니다. 이벽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앙을 조선 땅에 뿌리내린 선구자였으며, 그의 삶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학문에서 신앙으로
1779년(정조 3년), 이벽은 권철신, 정약전, 이총억 등 젊은 학자들과 함께 천진암에서 서학 서적을 연구했습니다. 이 모임을 천진암 강학회라고 부릅니다. 다산 정약용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눈 오는 밤, 이벽이 찾아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경전을 토론했으나, 그로부터 7년 뒤에는 서학을 비방하는 말들이 일어났다. 성대한 학문 모임은 다시 열리기 어려웠다."
이 강학회를 통해 서학은 단순한 학문을 넘어 종교로서의 천주교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씨앗, 북경으로
1793년 겨울, 이벽은 북경에 가게 된 이승훈을 찾아가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을 것을 당부합니다. 이승훈은 실제로 북경에서 그랑몽(Grammont)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귀국 후 그는 천주교 서적을 가져와 전했으며, 이벽은 은밀히 교리를 연구하고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세례자 공동체
1784년 음력 9월경, 이벽은 수표교 자택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신앙 공동체를 넓혀갔습니다. 최창현, 최인길, 김범우 등 중인 계층과, 정약종·약용 형제, 천철신·일신 형제 같은 계층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써 천주교는 지식인과 서민을 아우르는 새로운 신앙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탄압과 순교
하지만 조선 사회는 제사 거부와 평등사상 등 전통 질서에 도전하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했습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열린 신앙 모임이 관헌에 발각되면서 박해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벽은 고향 포천으로 은둔했으나, 끝내 1785년 8월 9일 박해 속에서 순교의 길은 걷게 됩니다.
이벽의 인물됨
이벽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습니다. 성호 이익은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풍모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키가 8척에 이르고,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했다. 언변은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 거침이 없었다."
황윤석 역시『이재난고』에서 이벽을 "지금 도성 사람 중 가장 총명하고 수리에 밝은 인물"이라 칭송했습니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며 누구보다 깊은 신앙적 열정을 지녔습니다.
화현 성지의 의미
오늘날 화현 이현 성지는 이러한 이벽의 삶과 순교를 기리는 자리입니다. 신앙의 씨앗을 심고, 박해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그의 흔적은 한국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뿌리가 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이벽의 희생과 믿을 기억 하며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깁니다.
이벽의 묘는 1970년대 후반에 발견되어 1979년 6월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묘는 그 후 새로 조성된 것으로 봉분과 묘비가 남아 있으며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화현 이벽 성지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운악산이 보이는 곳, 조선 후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은 다진 인물 이벽을 기리는 성지가 있습니다. 이벽은 천주교 신앙을 조선에 전파한 선구자로서, 그의 노력은 한국 천주교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천주교를 탄압했고, 이벽은 이 박해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됩니다.
1779년 (정조 3년) 천진암에서 권철신을 중심으로 정약전, 이총억 등 20대 초반의 남인계열 학자들이 이벽과 함께 서양선교사들이 지은 서적을 연구하였다. 그때 강학회에서 있었던 일을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눈 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오자 밤새워 불을 밝히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그로부터 7년 뒤에 서교에 대한 비방이 생겼으니, 이른바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천진함 강학회에서 천주학은 학문에서 종교로 승화되었습니다.
179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와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은 이승훈에게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으라는 당부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부탁합니다. 이에 이승훈은 북경에서 그랑몽(Grammont)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게 됩니다. 이듬해 이승훈은 귀국하여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기하원본 등의 서학 서적등을 전하자 이벽은 외딴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 연구와 묵상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1784년 음력 9월경 수표교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복음 전파에 나섭니다.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김범우, 지황 등의 중인계급과 마재의 정약종, 정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권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 전파하게 됩니다.
조선 후기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유입된 천주교는 전통적인 유교 사회와 충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들은 천주교를 학문 이상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신앙을 키워 갔는데, 그 중심에 이벽이 있습니다.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권철신 등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며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였고, 이런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결국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785년, 명례방의 장악원 근처,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신앙 집회를 하던 중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됩니다. 이에 이벽(세례자 요한)은 부친 이부만으로부터 포천집으로 불려들이게 되고, 결국 1785년 8월 9일 순교하게 됩니다.
화현 이벽 성지는 이러한 이벽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로, 순교자의 신앙을 기억하고 이어가려는 순례자들에게 깊은 의미를 전해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이 말년에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라고 예언하였다고 정학술의 <이벽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다블뤼(Antoine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비망록(Note pour la Stoire des Martyses en Coree, vol. IV)에 따르면, 이벽은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특히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라고 합니다. 황윤석의 <이재난고> 기록에도 '지금 도성 사람들 중에서 총명하고 수리에 밝고, 특별히 뛰어난 이벽이라는 선비가 있는데, 어려운 글 열 줄을 한눈으로 내려 보면서 비호같이 해석하며, 체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 한 번에 3회전을 할 수 있으며 두 길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평소에 <천주실의>를 몹시 좋아하여 그 무리 중의 으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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