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일)_25 ] 새롭고 신나게 성공하는 하루 |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 9월 ]
< 5주 차 : 9.28 ~ 10.4,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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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여러분, 한국 천주교의 첫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그 출발점에는 단 한 사람, 바로 이벽이 있었습니다.
그이 삶은 영광이 아니라, 오직 박해와 순교의 길이었죠.
오늘, 우리는 이벽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운악사 자락,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이곳에는 '조선 천주교의 첫 불씨'라 불리는 이벽을 기리는 성지가 서 있습니다.
1779년, 눈 내리던 겨울밤.
젊은 학자들이 천진암에 모였습니다.
정약전, 권철신, 그리고 이벽.
그들은 밤새 서학 서적을 읽고, 세상에 없는 새로운 진리를 토론했죠.
그 순간, 한국 땅에 천주교 신앙의 첫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몇 해 뒤, 이벽은 친구 이승훈에게 말합니다.
'북경에 가면 서양 선교사를 찾아 세례를 받아라.'
그리고 정말로, 이승훈은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됩니다.
곧 이벽도 세례를 받으며, 학자에서 복음의 전도자로 삶의 길을 바꾸게 됩니다."
"이벽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양반도, 중인도, 심지어 천민까지.
김범우, 정약용, 권철신...
누구든 만나면 신앙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믿음은 곧 조선의 질서를 흔드는 '사학'으로 낙인찍혔습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 모임을 하던 이들이 발각되면서,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이벽은 고향으로 숨어야 했지만, 끝내 피하지 못했습니다."
"1785년 8월 9일,
겨우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이벽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으나, 1970년 발견되어
천진암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성호 이익은 어린 이벽을 보면 '큰 그릇이 될 아이'라 했고,
다블뤼 주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언변은 강물처럼 흘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학자였고, 선각자였으며,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불씨였습니다."
"오늘날 화현 성지는,
이벽의 희생과 믿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그가 심은 작은 씨앗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함께 자라
오늘 한국 천주교의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화현의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이벽의 목소리.
'진리를 따르라, 믿음을 굳게 지켜라.'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화현 이벽 성지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운악산이 바라보이는 자리에는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진 이벽(세례자 요한)을 기리는 성지가 있습니다. 이벽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앙을 조선 땅에 뿌리내린 선구자였으며, 그의 삶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학문에서 신앙으로
1779년(정조 3년), 이벽은 권철신, 정약전, 이총억 등 젊은 학자들과 함께 천진암에서 서학 서적을 연구했습니다. 이 모임을 천진암 강학회라고 부릅니다. 다산 정약용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눈 오는 밤, 이벽이 찾아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경전을 토론했으나, 그로부터 7년 뒤에는 서학을 비방하는 말들이 일어났다. 성대한 학문 모임은 다시 열리기 어려웠다."
이 강학회를 통해 서학은 단순한 학문을 넘어 종교로서의 천주교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씨앗, 북경으로
1793년 겨울, 이벽은 북경에 가게 된 이승훈을 찾아가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을 것을 당부합니다. 이승훈은 실제로 북경에서 그랑몽(Grammont)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귀국 후 그는 천주교 서적을 가져와 전했으며, 이벽은 은밀히 교리를 연구하고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세례자 공동체
1784년 음력 9월경, 이벽은 수표교 자택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신앙 공동체를 넓혀갔습니다. 최창현, 최인길, 김범우 등 중인 계층과, 정약종·약용 형제, 천철신·일신 형제 같은 계층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써 천주교는 지식인과 서민을 아우르는 새로운 신앙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탄압과 순교
하지만 조선 사회는 제사 거부와 평등사상 등 전통 질서에 도전하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했습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열린 신앙 모임이 관헌에 발각되면서 박해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벽은 고향 포천으로 은둔했으나, 끝내 1785년 8월 9일 박해 속에서 순교의 길은 걷게 됩니다.
이벽의 인물됨
이벽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습니다. 성호 이익은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풍모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키가 8척에 이르고,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했다. 언변은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 거침이 없었다."
황윤석 역시『이재난고』에서 이벽을 "지금 도성 사람 중 가장 총명하고 수리에 밝은 인물"이라 칭송했습니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며 누구보다 깊은 신앙적 열정을 지녔습니다.
화현 성지의 의미
오늘날 화현 이현 성지는 이러한 이벽의 삶과 순교를 기리는 자리입니다. 신앙의 씨앗을 심고, 박해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그의 흔적은 한국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뿌리가 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이벽의 희생과 믿을 기억 하며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깁니다.
이벽의 묘는 1970년대 후반에 발견되어 1979년 6월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묘는 그 후 새로 조성된 것으로 봉분과 묘비가 남아 있으며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화현 이벽 성지
경기도 양주시 화현면 운악산이 보이는 곳, 조선 후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은 다진 인물 이벽을 기리는 성지가 있습니다. 이벽은 천주교 신앙을 조선에 전파한 선구자로서, 그의 노력은 한국 천주교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천주교를 탄압했고, 이벽은 이 박해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됩니다.
1779년 (정조 3년) 천진암에서 권철신을 중심으로 정약전, 이총억 등 20대 초반의 남인계열 학자들이 이벽과 함께 서양선교사들이 지은 서적을 연구하였다. 그때 강학회에서 있었던 일을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눈 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오자 밤새워 불을 밝히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그로부터 7년 뒤에 서교에 대한 비방이 생겼으니, 이른바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천진함 강학회에서 천주학은 학문에서 종교로 승화되었습니다.
179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와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은 이승훈에게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으라는 당부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부탁합니다. 이에 이승훈은 북경에서 그랑몽(Grammont)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게 됩니다. 이듬해 이승훈은 귀국하여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기하원본 등의 서학 서적등을 전하자 이벽은 외딴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 연구와 묵상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1784년 음력 9월경 수표교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복음 전파에 나섭니다.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김범우, 지황 등의 중인계급과 마재의 정약종, 정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권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 전파하게 됩니다.
조선 후기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유입된 천주교는 전통적인 유교 사회와 충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들은 천주교를 학문 이상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신앙을 키워 갔는데, 그 중심에 이벽이 있습니다.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권철신 등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며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였고, 이런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결국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785년, 명례방의 장악원 근처,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신앙 집회를 하던 중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됩니다. 이에 이벽(세례자 요한)은 부친 이부만으로부터 포천집으로 불려들이게 되고, 결국 1785년 8월 9일 순교하게 됩니다.
화현 이벽 성지는 이러한 이벽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로, 순교자의 신앙을 기억하고 이어가려는 순례자들에게 깊은 의미를 전해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이 말년에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라고 예언하였다고 정학술의 <이벽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다블뤼(Antoine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비망록(Note pour la Stoire des Martyses en Coree, vol. IV)에 따르면, 이벽은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특히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라고 합니다. 황윤석의 <이재난고> 기록에도 '지금 도성 사람들 중에서 총명하고 수리에 밝고, 특별히 뛰어난 이벽이라는 선비가 있는데, 어려운 글 열 줄을 한눈으로 내려 보면서 비호같이 해석하며, 체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 한 번에 3회전을 할 수 있으며 두 길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평소에 <천주실의>를 몹시 좋아하여 그 무리 중의 으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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