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마태오 18,19ㄴ-22)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202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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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마태오 18,19ㄴ-22)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2025.6.25.)

by honephil 2025. 6. 25.

[묵상]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마태오 18,19ㄴ-22)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2025.6.25.)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 광장 없이는 일치도 없다  >


찬미 예수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분단 70년이 넘는 세월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소설가 최인훈의 『광장』은 바로 그 분단의 비극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고전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왜 통일이 되어야 하는지 묵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에 사는 철학과 학생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유명한 언론인이었으나 해방 후 월북하여 북에서 고위 간부가 되었습니다. 이명준은 남한 사회를 '개인의 밀실'만 있고 진정한 소통과 연대가 이루어지는 '광장'은 없는 곳이라 비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 윤애와의 관계에서도, 부패하고 불의가 만연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존재 때문에 남한 경찰의 혹독한 조사와 학대를 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남한 사회에 대한 환멸은 극에 달합니다. 그는 마침내 '혁명과 이념의 광장'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월북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북한의 현실은 또 다른 절망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가 억압된 채, 오직 당의 구호와 집단주의만이 강요되는 '닫힌 광장'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연인 은혜를 만나 잠시 사랑의 기쁨을 느끼지만, 북한 사회 역시 그가 꿈꾸던 이상향이 아님을 깨닫고 깊이 좌절합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명준은 인민군 장교로 참전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옵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그는 남과 북, 양쪽 체제가 이념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자행하는지를 똑똑히 목격합니다. 부상당한 그가 간호장교가 된 은혜를 다시 만나지만,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폭격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가 된 이명준은 포로송환 과정에서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남한은 '부패한 밀실'이었고, 북한은 '가짜 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남과 북의 이념 대립에 환멸을 느끼며, 제3국인 '중립국'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를 태우고 인도로 향하던 배 위에서 이명준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찾던 진정한 '광장', 즉 이념을 넘어선 인간적인 사랑과 연대의 공간은 남에도, 북에도, 그리고 중립국이라는 제3의 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는 죽은 연인 은혜와 그녀가 낳았을지도 모를 자신의 딸, 그리고 푸른 바다를 바라봅니다. 결국 그는 두 마리의 갈매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기도할 때 두 사람 이상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희망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두 마음이 같은 것을 희망하면 분명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치의 광장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명준은 남과 북에 각각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남과 북이 갈라져서 그 사랑이 이루어질 광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 언제일까요? ‘하나’가 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남녀가 하나 되는 시간을 영원히 지속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순간일 뿐입니다. 무언가 관계를 하나로 이어줄 광장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분열은 그것 자체로 같은 민족 안에 갈라져도 살아갈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새겨줍니다. 그런 것이 남북한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일치로 나아가는데 분명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이런 분리된 광장에서 누구와도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이명준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성지순례 하면서 느낀 것은 이 성지순례를 순례하는 분들이 일치의 광장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성패는 많은 곳을 보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성지순례 하면서 친구를 사귀고 하나로 일치한 사람이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친했던 사람과도 사이가 틀어진 사람입니다. 성지순례가 일치의 광장인 것처럼, 우리나라도 일치의 광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qBFiJ6AeU7M?si=BXnvF5J4UFBmtA-i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너의 형제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You must forgive him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Mt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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