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마태오 22,1-14)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2024.8.22.)
1900년 무렵부터 성모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하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 우리는 세례를 잘못 받고 있습니다 >
신학교 때 예비군 훈련을 하면 신학생들은 수단을 벗고 예비군 군복을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예비군복장은 군대 제대할 때 입고 나왔던 옷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옷만 입으면 사람들이 바뀝니다. 말년 병장으로 모두 변하는 것입니다. 모자를 비뚜로 쓰고 윗도리는 밖으로 내고 담배를 뭅니다. 돌아올 때는 술도 거하게 취하여 워커 끈을 다 풀은 채로 복귀합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복장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겉은 군복을 입었지만 속은 여전히 수단을 입고 있는 신학생들도 발견이 됩니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밖의 복장보다 내면의 복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입어야 할 옷은 종의 옷이며, 사람들을 만날 때 입어야 할 옷도 종의 옷입니다.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믿음에 따라 우리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혼인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그는 분명 자신은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그 삶의 태도를 그에 합당하게 바꿉니다. 혼인 잔치를 망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힘으로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습니다(창세 3,7 참조). 자기들 스스로 하늘 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죽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창세 3,21 참조). 하느님을 만나 생겨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옷은 곧 정체성입니다.
새 정체성은 만남을 통해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미혼 남성이었는데,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면 이제 그 여인 때문에 나는 남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되면 이전 정체성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만나오던 여자들이 있었다면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그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전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성사로 치면 이 과정이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례는 어떤 옷, 곧 어떤 정체성을 가지게 할까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6-27)
저희 성당에서 강론이 끝나고 우리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를 외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리스도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3-4)
우리가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죄로 살던 이전의 내가 죽었고 이젠 그리스도를 입어 그리스도로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나를 그리스도로 살게 하고 하늘 나라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춘 존재로 만듭니다.
50조 사업가 ‘댄 페냐’의 쓴소리를 들어봅시다.
“당신은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친구를 보여주세요. 당신 미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와 어울리나요? 당신은 빌 게이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스티브 잡스나 워렌 버핏도 아닙니다. 당연히 일론 머스크와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나요? 그들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일론 머스크의 일과 삶에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을 때의 일과 삶의 균형을 이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빌 게이츠처럼 사나요? 헨리 포드처럼 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세상의 부를 만든 사람 중 아무도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면 왜 당신은 그들이 가졌던 것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세요? 20년 또는 30년 후에 당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지금 그 사람에게 가세요.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일론 머스크처럼 사십시오. 그러면 높은 자존감은 엘론 머스크와 커피를 마실 시간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받고 싶다면, 당신 나라 대통령처럼 옷을 입으십시오. 당신 나라 총리처럼 옷을 입어요. 당신에게는 첫인상을 남길 기회가 한 번뿐입니다. 그러나 당신들 대부분은 당신들 옷차림 때문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두 번째 인상은 입을 열 때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장 큰 존경심을 가지고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더듬거리고, 중얼거리고,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50조 사업가: 부자 되려면, 옷부터 똑바로 입어야’, 필미필키 티비, 유튜브]
저 같은 경우는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믿기 위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를 자주 외웁니다. 그리고 마치 그리스도의 그 심장이 나의 심장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혼인 예복을 입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라 믿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세례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https://youtu.be/cBD_y5gOxj0?si=DXKKTwQ-gR9KgJgF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소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에제 36,26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a new spirit I will put within you. Ez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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