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 10,25-37 ) - 연중 제27주간 월요일(2023.10.9.)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 참 사랑은 어부의 그물처럼 파견 받은 사랑 >
세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면서도 가장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단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알면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는 구원에 대해 묻고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금방 눈치챕니다. 골라서 사랑해 보겠다는 뜻인데, 그 속내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상대를 이용하겠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주려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파견받지 않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500일의 섬머’(2009)는 남녀가 왜 서로 노력하는데 그 사랑이 완성되지 않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톰은 로스앤젤레스의 소규모 카드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로, 운명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믿는 젊은이입니다. 반면 섬머는 독립적이며 자유분방한 성격의 여성으로,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으로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습니다. 그런 둘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500일 뒤에 헤어졌습니다.
영화는 둘이 헤어지게 된 것이 누구의 탓인지를 묻습니다. 먼저 느닷없이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한 섬머에게 탓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보다 보면 톰도 탓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톰은 섬머의 미온적인 태도에 지쳐갑니다. 함께 잠자리까지 하는 사이지만, 자신만을 사랑하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습니다.
섬머는 확신을 주지 않으면서도 노력합니다. 어느 날 헤어짐의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술집에서 둘이 술을 마시는데 어떤 잘 생기고 멋진 남성이 섬머에게 치근덕댑니다. 섬머는 계속 싫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마치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처럼 톰은 술만 마십니다. 섬머에게 치근덕대던 남자가 톰을 모욕했을 때 그제야 톰은 그 사람과 싸웁니다. 이 일로 섬머는 헤어지자고 합니다. 톰은 섬머를 구해 주려 한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누가 봐도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지 섬머를 위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둘은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섬머는 이제 운명을 믿는 사람처럼 이야기합니다. 둘의 만남은 운명이었지만, 짝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고. 그렇지만 여전히 톰의 손을 놓지 못합니다. 톰은 운명을 거부하며 노력만 하는 그녀와 이별을 선언합니다. 그러며 이젠 섬머처럼 운명의 여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려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도전합니다.
한 사람은 사랑은 노력하며 성장시키는 것으로 여겼고 한 사람은 먼저 운명이라고 믿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무리는 서로의 연애관이 바뀌며 끝납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을 만날까요? 영원히 쳇바퀴 돌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사랑이 파견받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이혼율이 낮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도록 파견받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웃을 찾아 나서려는 율법교사를 사랑하도록 파견하십니다. 파견 받아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그 파견한 분을 위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를 잘 키워달라고 파견받습니다. 현대에서는 여성들에게 비난받을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자녀에 대해 남성이 할 수 없는 여성들만의 능력이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만큼이나 자녀의 감정을 알아차릴 감수성이 없고 자녀에게만 집중할 능력도 없습니다. 반면 남편들은 나가서 돈을 버는 데는 여성보다 유리합니다. 본인이 아기를 낳을 일도 없고 감수성이 무뎌서 더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돈을 주며 자녀에게 파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파견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자녀를 키우려 한다면 어떨까요?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외로움을 자녀를 통해 채우려 합니다. 본인은 이유 없이 자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자녀를 통해 부활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한다면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며 서운해합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항상 부활을 전제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파견한 이로부터 그 보상과 부활을 추구합니다. 마치 어부에게 던져진 그물처럼 물고기에게 보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물에 대한 보상은 그 그물을 던진 어부가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파견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https://youtu.be/lw1maSUhRgU?si=82fHKfTbblKA8IWS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루카 10,25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Lk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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