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오 15,21-28) - 연중 제20주일 (2023.8.20.)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오 15,21-28) - 연중 제20주일 (2023.8.20.)

by honephil 2023. 8. 20.

[묵상]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오 15,21-28) - 연중 제20주일 (2023.8.20.)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자비를 청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읍시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자의 낮추심으로 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증언하도록 합시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기도 >

 

주님,

좋은 주님의 날 감사하나이다.

아멘

 

 

|||||||||||||||||||||||||||| 강론  ||||||||||||||||||||||||

 

 

연중 제20주일 강론 - 김종욱 미카엘 6 지구장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의 모습을 함께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드리게 될 때는 보통 언제예요?
다 편안할 때에요?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뭔가 어려움이 생겼을 때 뭔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고통스러울 때죠.
가나안 여인도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딸이 있어서 많이 고통스러웠죠.

아픈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식이 그렇게 아픈 경우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서 끊질기게 청했던 것이죠.
그런데, 처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뜻 밖이었죠.
뭐라 하셨어요.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자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하고 강아지는 

이방인들이 사는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이런 비유를 들으면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래서 이 비유를 들은 여인이 빈정이 상해서 

획 돌아설 수도 있었을 텐데, 뭐라고 다시 얘기했나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하죠.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를 무엇에 비유한 거예요.
밥상 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기다리는 강아지에 비유한 것이죠.
주님 맞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 저는 자격이 없지만,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여인의 이 말에 예수님이 깜짝 놀라셨죠.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에게는 우리는 뭘 보나요?
우리가 바치는 청원기도의 모델을 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간절히 청한 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동기에서 매달린 거죠.  딸이 아프니까요. 

아픈 딸을 위해서 청원한 거죠. 

우리는 이렇듯 순전히 인간적인 동기에서 주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나 자신이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자녀에게 

고통이 있을 때 문제가 있을 때, 보통 때는 조금은 형식적으로

 기도하다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혹자는 이런 청원기도를 수준이 낮은 기도고 

기복신앙이다라며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제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약함과 한계성을 지닌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기대는 것, 그분께 자비를 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작은 믿음, 어린아이와 믿음을 얘기하십니다.

아이들은 보통 부모에게 뭘 자꾸 달라고 하잖아요. 

아빠 나 저거 사줘, 솜사탕 사줘.. 이런 어린아이 같은 믿음까지도 

품어주시어 당신의 자비를 체험하게 해 주셔서 

더 깊은 믿음 더 성숙한 믿음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체험이 그걸 말해줍니다. 우리가 인생을 가만 뒤 돌아보면 

그런 체험들이 있죠. 

가나안 여인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청했듯이

 우리도 그랬을 때가 있죠. 

우리가 간절히 기도드리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어도, 거기서도 당신 오른손이 

저를 꼭 잡아주신다는 시편 139편의 말처럼 

그분의 손길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는데,

그분의 사랑으로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 주님은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날 사랑하시는구나 이걸 깨닫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고통 속에서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바로 거기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 사랑의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저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복음에 보면 너희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청하는 자녀들에게 

더욱 좋은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이런 말씀이 있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잘 못 알아들었어요. 

애가 아빠 솜사탕 사줘 하며 솜사탕 사주지 않냐.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청하는 이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느냐. 

이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마음으로부터 만나게 되는 것,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게 원체험이 되어서 

주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 안에서 인생의 어두운 때를 

이겨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것. 

이게 더 좋은 거 아닙니까.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이런 하느님의 선하신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 오늘의 묵상 ||||||||||||||||||||||||

 

<내가 칼자루를 쥐고 기도하지는 않는가?>

 

    오늘 복음은 마귀 들린 딸을 고치고 싶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고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그 신뢰를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자존심도 버렸는지 시험하기 위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강아지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자비를 간청하고 이에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녀가 원하는 청을 들어주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청하면서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녀가 아니라 강도가 되는 행위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고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모죄로 뒤주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도 아무 이유 없이 100여 명이나 죽이는 미쳐버린 아들을 살려두거나 왕위를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화 ‘역린’(2014)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떤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똑똑히 지켜본 정조가 어떻게 자신의 왕위를 굳혀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조의 편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제 갓 왕이 된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환갑이 넘어 결혼한 젊은 할머니 정순왕후와 온 나라 군대의 80%를 쥐고 있는 구선복 장군에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였습니다. 구선복 장군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때 사도세자에게 얼굴에 침을 뱉고 밖에서 음식을 쩝쩝거리며 정조의 아버지를 놀렸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정순왕후와 노론의 반란 세력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조를 죽일 것인지 그 방법만 논의하면 되었습니다. 
    정조 이산은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다르게 칼자루를 모든 이들에게 쥐여주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을 시해하려고 어렸을 때 내시로 들어온 살수 상책이 나옵니다. 정조는 상책에게도 자기 목을 내어줍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그를 풀어줍니다. 결국 상책은 정조를 대신하여 죽습니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믿어주지 않았는데 임금만이 자신을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조가 설득해야 할 가장 큰 인물은 구선복 장군이었습니다. 구선복 장군은 자기 아버지를 능멸한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는 정순왕후의 명을 받고 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구선복 장군이 아직 진군 중일 때 그들 안으로 들어가 많은 군사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칼을 구 장군에게 던집니다. 모든 군인 앞에서 임금이 장군에게 칼을 던지며 목을 치라고 할 때 왕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정조는 말합니다. 
    “임금의 보검이다. 이 칼로 나를 베겠나, 아니면 나의 칼이 될 텐가?” 
구선복은 부하들이 많이 보는 가운데 자신을 무력화한 임금을 칼로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일단은 임금 편에 서기로 합니다. 
    설득의 전문가인 다카시마 유키히로는 “설득은 20%의 기술과 80%의 인간적 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설득은 상대로부터 은총을 얻어내는 일입니다. 자칫 칼자루를 내가 쥐고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강도에게 순순히 은총을 내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타니 쇼헤이는 일본 야구 선수로서 투수와 타자를 겸하며 메이저리그에서 매년 역사를 갱신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겐 철칙이 있습니다. 떨어진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남이 버린 운이라고 생각하고 줍는 것입니다. 그리고 팬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 어린이들에게도 친절하게 다 사인을 해 줍니다. 하늘의 운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늘을 신뢰한다는 표현이 바로 쓰레기를 줍는 일입니다. 하늘이 이렇게 무장 해제 한 사람에게 축복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칼자루를 자신들이 쥐기를 원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에게 이용 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이나 가진 재산을 다 봉헌하며 자신의 안위를 모조로 주님께 맡기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우리 신뢰를 나 자신이 아닌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얻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은총의 사람이 되기 위해 이러한 겸손함이 곧 믿음이고 그 믿음만이 은총의 그릇이 됨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이사 56,1

Observe what is right, do what is just. Is 56,1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