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요한 20,1-9) - 주님 부활 대축일 (20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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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요한 20,1-9) - 주님 부활 대축일 (2023.4.9.)

by honephil 2023. 4. 9.

[묵상]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요한 20,1-9) - 주님 부활 대축일 (2023.4.9.)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화답송 후렴).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이듯, 주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의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 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 부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날이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이제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맙시다.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벅찬 기쁨을 노래합시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사랑은 부활을 갈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부활과 재생은 다른 말입니다. 라자로는 재생하였습니다. 방전된 배터리가 다시 충전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시 충전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되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자연계 내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모든 것들은 다 죽어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죽습니다. 다만 인간을 위해 봉사하다 죽어가는 것들은 인간이 최대한 다시 되살려냅니다. 스마트폰을 충전시키고 액정이 깨지면 다시 교체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봉사와 재생의 삶을 반복하다가 저절로 부활이 믿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은 죽음과 부활의 연속입니다. 고정원 씨는 자기 가족을 죽인 유영철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를 받고 자기를 봉헌했더니 용서의 마음이 생겼고 다시 살아나 유영철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사랑으로 내가 죽으니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은 오로지 ‘사랑’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인간보다 돌아가신 그분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완전히 죽어 소멸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벌써 부활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들이 무덤에서 만난 천사들은 갈릴래아로 가면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함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녀들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삶이 갈릴래아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 안에서만 믿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입니다. 부활을 전한다는 말은 우리도 그러한 존재임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르치려는 사람이 더 많이 배웁니다. 흘려보내려는 것이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져서 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하려고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믿음’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죽음으로 훌륭한 인간이라는 믿음을 줍니다. 이것이 ‘자존감’이 되고 그 자존감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귀한 존재임을 믿게 하려면 먼저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숨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은 자녀에게 자신들의 살과 피로써 전해집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도 하나의 투자입니다. 투자는 이익을 전제합니다. 이익 없이 투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삶은 무언가를 위한 투자입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이 죽음은 돈이 되었건, 쾌락이 되었건, 명예가 되었건 무언가를 위한 투자가 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돈에 생명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사랑에 투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에 투자하려는 사람은 그 이익을 기대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줌이기 때문에 부활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하려는 이에게 그 보상을 확실히 믿게 해 주십니다. 

 

    백종원 대표가 망해가는 식당에 찾아가 그들에게 비법을 전수해줍니다. 만약 그들이 백종원 대표의 레시피를 전수하고 싶다면 그 식당은 대박이 납니다. 하지만 장사가 잘되기 시작하면 대부분 식당은 이전의 자기 방식대로 되돌아갑니다. 백종원 대표는 자살 직전까지 갔다가 요식업으로 부활한 사람입니다. 이웃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사람은 그의 레시피를 따르고 그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돈이 우선이라 요령을 부리는 집들은 폐업에 이르게 됩니다. 

 

    영화 ‘미녀와 야수’(2017)는 자기만 알던 왕자가 야수가 되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던질 때 그 저주가 풀린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죽음의 저주도 기꺼이 내어줄 때 풀립니다. 부활은 사랑하려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부활을 갈망합니다. 갈망할 수 없으면 투자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사랑하면 믿어지고 안 하면 안 믿어집니다.

  https://youtu.be/xoJAjS7f5kE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요한 20,9

Jesus had to rise from the dead. Jn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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