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오 12,1-8)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202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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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오 12,1-8)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2022.7.15.)

by honephil 2022. 7. 15.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기고 1274년 무렵 선종하였다.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그를 시성하였고,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안식일은 무조건 쉬는 날이 아닌 '이것'을 내려놓는 날!>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먹다가 바리사이들의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안식일은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주인이 당신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행복마다 주인이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했을 때 잠자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무서운 것이 나올까 봐 두려웠던 것은 아니고 자고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공포를 해결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깨어있을 때의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게 놀고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힘이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행복을 맛보게 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어도 되니까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다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태중의 아기처럼 즐기다가 새로운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죽음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하다면 저세상에서 만나게 될 부모가 나를 사랑함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의 주인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재미있게 놀았더라도 부모가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고 있지 않았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당장 먹고살 것이 걱정인데 무슨 놀이가 행복하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행복의 바탕에는 생존을 책임지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이가 생존이 됩니다. 놀이가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생존이 보장되어야 삶이 놀이가 됩니다. 예수님은 생존을 보장하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성전에 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바리사이들처럼 지킬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느님이면 마치 태아처럼 태중에서 걱정 없이 편안합니다. 

 

    유튜브에서 어떤 노숙자가 자기 개 두 마리에게 자기 전 재산을 다 털어 케이크를 사고 생일잔치를 해 주며 이것밖에 해 줄 수 없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것은 주인입니다. 성당에 와서도 걱정하고 있다면 그 성당의 주인이 하느님이 아니고 나인 것입니다. 이럴 때 바리사이처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생존이 보장되면 삶이 놀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나의 모든 삶은 죽지 않기 위한 노력이 되고 이 경쟁의 삶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생존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날 가난한 스님이 부자 스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오늘 길을 떠나려 합니다. 남해의 어느 큰 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몸 건강히 계십시오.”

가난한 스님이 떠난다는 말에 부자 스님이 매우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여기서 남해까지가 얼마나 먼 거리라고 그렇게 함부로 떠난단 말이오. 나 역시 남해로 가려고 진즉부터 준비하고 있었는데,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 이러고 있는데…. 그런데 자네는 나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였단 말인가?”

 

그러자 가난한 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뭐 준비랄 것이 있겠소. 물병 하나 바랑 하나면 되지.”

가난한 스님이 달랑 내민 물병과 바랑을 보며 부자 스님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뭐라고? 이것으로 그 먼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가난한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물병은 허리에 차고, 바랑은 등에 짊어진 채 문밖으로 나섰습니다. 터덜터덜 멀리 사라져 가는 가난한 스님의 등 뒤에서 부자 스님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사히 도착이나 할지 원, 쯧쯧…. 나는 준비를 철저히 해서 떠나야지.”

 

    그다음 해가 되자 가난한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얼굴은 해쓱해지고 옷은 누더기가 되었지만, 스님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난한 스님을 에워쌌습니다. 가난한 스님은 고생하면서 겪은 이야기와 남해의 큰 절과 자신이 만난 부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자 스님은 그때까지도 남해로 떠날 생각을 못 하고 조금 더 돈을 모을 생각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안식일을 지낼 수 있었을까요?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먹을 양식이 없는데도 하루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은 내년까지 먹을 것이 있는데도 쉬지 못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준비해서 하려면 평생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모시면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어먹는 것은 놀이입니다. 누구에게는 생존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과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놀이가 됩니다. 삶이 놀이가 될 때 안식일의 주인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새로 태어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 파산!”이란 문구를 들고 초췌하게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SNS에 올렸습니다. 테슬라에 다니는 직원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세계 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는 지금 안식일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걱정을 내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 놀이가 됩니다. 

 

    염려와 걱정은 주인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염려하고 있다면 나는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걱정을 성당에 놓고 와야 합니다. 걱정한다는 말은 내가 주님이란 뜻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집이고 나는 그 집의 종입니다. 종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걱정을 버리는 자리입니다. 항상 성전에서 살면 인생이 즐거움이 됩니다. 안식일은 무조건 쉬는 날이 아니라 걱정을 내려놓는 날입니다. 

 https://youtu.be/7UdnwZzS4vM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마태 12,7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Mt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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