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착한 사마리아인 되기’는 나에게 ‘권고’인가 ‘법’인가?>
1928년 미국의 한 부둣가, 산책을 하던 한 남자가 실수로 바다에 빠졌습니다. 친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지점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 사람이 도와주었으면 자녀가 살 수 있었다며 그를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굳이 도와주어야만 하는 법은 없다며 그 남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만약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는 이 법이 있습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해주어도 자신이나 제삼자에게 위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 자는 3개월에서 5년까지의 징역과 360프랑에서 1만 5천 프랑(한화 약 40만 원~1,700만 원)까지의 벌금을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을 호주와 폴란드, 일본에서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 법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반발 때문에 통과가 못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산 여중생 사건’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지나가던 많은 사람이 여중생의 구타 현장을 목격했지만, 오히려 간섭하면 안 좋아진다는 인식으로 인해 방관하였고 피해 여중생은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폭행당했습니다. 신고가 늦어져 경찰이 출동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수없이 많습니다. 신고만 해 주어도 사람이 사는데 구해주지 않습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는 종교인에게만 있습니다.
저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지 못한 사제였던 적이 많습니다. 사고 난 사람을 전화로 신고만 해주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차에 불이 나거나 그 사람의 출혈이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신고만 해 주었으니 할 건 다 했다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마리아인 강론을 많이 하더라도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잘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자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아가 원하는 것을 따라주는 것을 자유라고 여깁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소유욕, 성욕, 지배욕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노예 생활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도 법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남을 도와줄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 법에 지배받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은 다릅니다. 천국은 더 높은 수준의 법이 있습니다. 우물에 빠진 형제를 구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자녀를 부모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권고로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가 아닙니다. 법입니다. 법이 아니면 우리는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자아는 ‘법’이고 그 법을 이길 수 있는 수준의 명령은 ‘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저 법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법에는 반드시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대가가 따릅니다. 하지만 권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권고로는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입법자로서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벌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해리 포터 – 비밀의 방’(2010)에 도비라는 집 요정이 나옵니다. 도비는 사실 좋지 않은 주인에게 속해있습니다. 아무리 해리포터를 도와주려고 해도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도비는 주인에게 새로운 옷을 선물 받았을 때는 주인에게서 자유로워집니다. 해리포터는 자신의 양말을 주인 것으로 속여서 선물합니다. 그리고 도비는 말합니다.
“도비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해리포터를 도와줍니다. 이상하게 자유라고 하면서 해리포터를 섬깁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법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법을 해리포터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리포터를 구하려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죽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주셨습니다.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입고 더는 돈과 쾌락과 명예로 우리를 치장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뱀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주인이 주는 명령은 법입니다. 자아가 우리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속-육신-마귀는 법입니다. 이 법을 누를 수 있는 새로운 법이 아니면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법을 이기는 것은 법입니다. 권고로는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권고는 안 해도 되지만 법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것이 나의 법이여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을 때, 나는 지금 이미 천국의 법을 따르는 것이고 천국에 사는 것입니다. 나의 입법자를 하느님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유를 옹호하는 자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제정을 스스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법입니다. 이 법이 없으면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은 권고가 아니라 법이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루카 10,27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Lk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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