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복음선포 여행을 떠나는 72 제자들을 향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때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사람이 일단 삼시 세끼 든든히
먹어줘야 복음을 선포하든 뭐든 할 텐데, 지갑에
단 몇십만 원이라도 있어야 장거리 여행길에
숙소도 잡고 씻기라도 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맨땅에 헤딩하라 시니, 제자들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의 배경에는
하느님 나라 도래와 관련된 긴박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 그리고 공생활과
더불어 이제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과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목 빠지게 기다려왔던
인생 최고의 가치, 구세주 하느님께서 강생 하셨고,
생명의 말씀이 시시각각으로 선포되고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대상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대상들을
초스피드로 내려놓고,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긴박함과 시급함의
결론이 곧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인 것입니다.
2세기 중엽 한 익명의 신앙인에 의해 쓰인 글귀는
‘진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은
참아 받습니다.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란
사명을 제자들을 부여하고 나서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파견에 앞서 간단한
당부를 하시는데, 그 핵심이 어느 한 곳에
연연해하지 말고 ‘무심한 나그네’처럼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복음 선포에 매진하려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무소유’,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버림’, ‘떠남’을 강조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보다 영원한 가치관,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대상, 그래서 인생과 목숨을 걸어
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고 부차적인 것을 과감히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물러들 거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마태 9,24
Go away! The girl is not dead but sleeping. Mt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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