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3-26)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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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3-26)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21.9.20.)

by honephil 2021. 9. 20.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 몇몇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 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를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2세기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은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순교자들의 피로 심은 교회의 씨앗에 물을 주고 자라게 한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신자들의 믿음과 일상 속 신앙의 증언입니다.

 

오늘 제2독서를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한국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은 살아서는 부끄럽지 않은 삶, 그리고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삶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우리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의 은총을 청하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교회에 가장 큰 신앙의 걸림돌을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으로 보셨습니다.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은 우리에게 좀 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속삭입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니?’ ‘요즘 시대에 이 정도는 괜찮아!’ 또한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나의 사고와 맞지 않으면, 합리적, 이성적, 일반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나의 하느님’을 만들고 추종하게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길을 가기보다 옳은 길, 주님께서 알려 주시는 길을 갈 때, 가장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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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초점: 잠과 죽음의 순간에 느낄 행복>

 

    오늘은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본받기 위해 다짐하며 노력하는 날입니다.

 

한국의 성인들은 모두 순교자들입니다. 순교를 생각할 때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뭐죠?”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순교자들의 죽음은 자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는다면 거기에서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 죽음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구별됩니다.

 

    2014년 11월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 세 명이 자살을 선택한 일이 있었습니다.

10월 30일, 50대 이모 씨와 그의 부인, 그리고 12살 딸이 안방에 나란히 누워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들 옆에는 타다 남은 연탄재가 있었습니다. 딸 이모 양이 계속 학교에 빠지자 담임 교사가 집으로 찾아왔고 문이 잠긴 걸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경찰은 부인과 딸이 먼저 목숨을 끊고, 귀가해 이를 발견한 남편이 뒤따라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지난 수년 동안 뚜렷한 직업 없이 주택경매에 매달리다 실패를 거듭해 큰 빚을 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파트에서 일하던 부인도 두 달 전 직장을 그만둬 마이너스 통장으로 근근이 생활해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웃 주민은 집도 다 빚으로 산 것이라 이자 내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곁에는 부인과 딸이 남긴 유서만 놓여 있었습니다. 먼저 부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살아서 발견되면, 응급처치는 하지 말고 그냥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딸의 유서는 이렇습니다.

 

    “그동안 부모님 말씀 안 들어서 미안하다.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 나는 슬프지 않다. 행복하게 죽는다.”

    이 양은 힘든 가정형편에도 성실히 학교생활을 해와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숨진 채 나란히 누운 이들 가족 옆에는 아빠가 딸과 먹으려고 사 온 가리비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습니다.

 

    자살은 살인입니다. 물론 죽어가면서 회개했다면 모를까, 마지막에 살인하고 죽어서 천국 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양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좀 특별합니다. 분명 자살이지만 “행복하게 죽는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이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입니다.

 

    그녀의 죽음 안에는 행복도 있고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믿음도 있고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자살은 자살이기는 하지만 순교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보게 됩니다. 죽음이 행복이 되려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순교자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에 올 부활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후대에 남겨 본받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죽을 때 행복하고 행복한 이유를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교입니다. 믿었고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하시며, 당신 삶에 만족하셨고 그 이유가 이웃사랑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웃사랑은 순교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죽음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행복하고 자기 삶을 뒤따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순교의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해 지금 자살로 가고 있는지, 순교로 가고 있는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는 그날 ‘잠자리’에서 결정됩니다.

 

     삶이 순교인 사람은 잠자리가 행복이며, 삶이 자살인 사람은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한 사람에겐 잠이 상이 되지만, 한 사람에겐 잠이 두려움이 됩니다. 그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잠자리에 누울 때,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날은 순교의 삶을 산 것이고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것을 양심이 심판해 줍니다.

 

    어느 주말에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에게 응급실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에게 치료를 받던 말기 암 환자의 경동맥이 터져서 응급실로 실려 온 것입니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수술이나 지혈술을 해야 합니다. 쇼크 때문에 심장이 멎으면 심폐소생술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냥 편히 보내주세요.”

 

그 환자는 이미 치료를 포기할 정도의 상태였고 더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현재에만 충실해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큰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였고 자신의 상태를 아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한 달 전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네? 아버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데요?”

    “그냥…. 치료하면 좋아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버지는 항상 “나는 이번에 치료받으면 곧 좋아질 거다.”, “바쁠 텐데 병원에 따라올 필요 없다.”, “아버지는 잘 이겨내고 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초점이 죽음이 아닌 지금의 삶에 맞춰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의사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혈관이 터져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현 상황을 말해주었고, 아들은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환자는 결국 회사나 대인 관계, 인생 등 정리해야 할 상황이 많았지만 하나도 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순교자들은 항상 ‘죽음’의 순간에 두었습니다.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했습니다. 만약 지금의 행복을 위해 죽음의 순간을 잊는다면 그것이 자살입니다.

 

     잠이나 죽음이나 상을 받으러 가는 순간의 마음이라면 그런 사람의 하루의 삶이나 인생은 ‘순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오늘 하루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잠이나 죽음이나 다 부활의 영광을 받는 마지막 발걸음이 됩니다.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초점을 ‘잠’과 ‘죽음’에 둡시다. 그 순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https://youtu.be/1rpM6ZZbrf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루카 8.18

 

Take care

how you hear.

Lk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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