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마태오 26,14-25) - 성주간 수요일 (2021.3.31.)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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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회의 사람입니다.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강의하고 그 복음 말씀에 젖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듭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나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과 또 그분의 말씀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더 드러내고 유명해지고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나의 앞에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내가 너무 나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고민과 질문은 나태하고 오만하였던 저의 정신을 맑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 예언이 저에게는 미래의 일이 아닌 이미 행한 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자신의 것을 채웠던 사람은 유다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처럼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그런 저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어쩌면 복음을 묵상하며 쓰고 있는 이 글도 예수님을 팔아 내 배를 채우려고 하는 배반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우리는 정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을 버릴 때, 핑계를 내려놓고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되새길 때 우리의 실수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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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이 일어나는 근원적 원인: 하느님 위에 서는 맛>
가리옷 유다는 상처를 받고 폭풍우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방법이 은화 서른 냥이었습니다. 그는 상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이 받아 고통스러운 상태라 더는 고통스럽지 않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트남 출신 승려 틱낫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전 나는 폐에서 피가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나는 수시로 피를 뱉어야만 했다. 지금 숨을 쉬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폐가 세균에 감염되었던 때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쉬는 매번의 숨마다 너무 맛있고, 너무 좋다.”
폐에 바이러스가 감염되었을 폭풍과 같은 때를 두려워하여 지금 그것으로부터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 상처를 이용해 지금의 빗속에서도 기분 좋게 춤을 출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의 행복은 상처를 주님께서 필요해서 주셨다고 소화를 한 사람과 그것을 소화하지 못해 아직도 체해 있는 사람과의 차이에서 생깁니다.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믿으면 옛 상처가 소화되고 지금의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지만, 하느님을 나쁜 분으로 여기면 폭풍 속에서 살려고만 버팁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것이 전부라고 그것에만 집착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그것이 은전 삼십 냥이었습니다.
어떤 스승과 제자가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묵고 갈 집을 발견하지 못하던 찰나에 한 허름한 오두막을 발견합니다. 둘은 그 집주인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부부와 자녀들이 쉴 공간도 부족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쉴 곳을 내어주었습니다. 스승은 가장에게 물었습니다.
“이 황량한 들판에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십니까?”
“예, 저희에게는 여읜 암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젖을 짜서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치즈를 만들어 장에 가서 팔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 암소 덕분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둘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잠시 가다가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려라.”
제자는 놀랐습니다. 그러나 항상 스승에서 순종하던 착한 제자이기에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몇 년 뒤 제자 혼자 다시 그 길을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그 집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름하던 집은 없고 좋은 집이 지어져 있었으며 화단에 꽃과 나무들이 심겨있었습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이 이사 온 것으로 여기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가족이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묻자 가장이 설명했습니다.
“네, 두 분이 떠나시던 날 아침 저희 암소가 그만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살길이 막막한 저희는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돌밭에 약초를 뿌렸는데 그것이 잘 된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여 밭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의외로 농사도 잘 되어 이렇게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암소가 죽은 것은 저희에게 큰 복이 되었습니다.”
[출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유튜브 채널, ‘책 읽는 다락방 J’]
지푸라기를 잡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어서면 허리밖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폭풍처럼 여겨지는 근저에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심겨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있으면 여읜 암소 한 마리에 집착합니다. 폭풍 속에서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은전 삼십 냥입니다. 폭풍우 속에서 그것을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는 왜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누구는 무자비한 분으로 여기게 되는 것일까요? 이지선 같은 자매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얼굴과 몸에 큰 상처로 살면서도 어떻게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 안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사실 폭풍 속에서 사는 이유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비판하며 하느님이 된, 아니 하느님을 넘어선 자신을 즐기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리옷 유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을 비판하며 높아지려는 나의 교만을 보아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믿고 행복하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러면 주님께서 은총을 주십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누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대부분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맛에 길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행복해지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것을 찾을 것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라 믿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사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니다. 그 눈으로 지금이 폭풍우가 아니라 그저 비가 내리는 것일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이 나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좋으신 분으로 믿고자 원하기만 한다면 이제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만이 은전 삼십 냥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집착은 두려움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폭풍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저 빗속에서 어떻게 춤출 것인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춤의 맛을 더해 주기 위해 하늘에서 물을 뿌려주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