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18,9-14) - 사순 제3주간 토요일 (2021.3.13.)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하며 유턴하라는 말이 계속하여 들려옵니다. 자주 다녔던 길이고, 이 시간이면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방향은 차가 막혀 더 늦을 것 같아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선택한 길도 이내 주차장처럼 막힙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은 것을 괜히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쉽게 그 선택을 바꾸지 않습니다.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느끼지 못하면 지금의 인생 방향도 되돌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선택에서 방향을 바꾸어 유턴하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기회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신념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래서 그 가치가 구원으로 이끄는 힘임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도들이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세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하며 자신의 삶이 최선이라 자부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나 옳은 판단과 행동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오만이고 교만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고 예수님을 따르는 방향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회개의 시작은 먼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오만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이제 회개를 시작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잘못을 인정합니다. 유턴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하느님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의 출발선에 서려면 자신의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바라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세리와 비교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만남은 그냥 자신이 이미 내린 결론을 확증받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의로움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믿는 바대로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과 비교해 이미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심판관이시고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구원자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된 사람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왜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비교우위에 놓으려고 했을까요? ‘열등감’ 때문입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남을 심판하는 버릇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 올라가고 싶다는 말은 자신이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열등감은 ‘자존감’이 부족한 데서 옵니다. 스스로 자존감을 키우려고 하면 남과 비교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남과 비교하려다 보면 옳고 그름을 많이 따지게 됩니다. 자신이 옳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당대는 그르다고 말합니다.
영화 ‘원더’(2017)는 부모의 사랑이 자녀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단절을 경험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어기’는 특별한 외모로 안면에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 27번의 성형수술을 받아 겨우 눈, 코, 입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학교에 보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생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물론 어기를 좋아해 주는 ‘잭’이란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기가 어기처럼 태어났으면 자살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친구도 교장 선생님의 부탁으로 힘겹게 어기와 친해지려 했던 것입니다. 어기는 그 말에 상처 받지만, 그가 이전의 친구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서로 화해합니다. 잭도 자신이 속해 있던 친구들과 싸우며 어기 편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그를 싫어하는 친구들도 점점 그의 편이 되어갑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지쳐도 부모만은 어기편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누나인 ‘비아’도 항상 어기 편입니다. 그래서 어기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나 비아가 오히려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절친 ‘미란다’로부터 갑자기 따돌림을 당하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모의 관심을 위해 힘들어하는 어기를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비아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는 힘들어하는 비아를 안아줍니다.
비아의 절친인 미란다는 어기에게 헬멧을 선물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미란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 줍니다. 미란다는 좋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비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항상 부러워했고 질투까지 했습니다. 이 열등감이 어기에게 헬멧을 선물하게 했습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어기는 사람들 앞에서 헬멧을 쓰고 다녀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헬멧을 쓰고 다니던 사람은 미란다 자신이었습니다. 그 열등감이 남에게도 헬멧을 씌워 움츠러들게 만들고 비아도 따돌리며 열등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하지만 미란다도 연극부에서 인정을 받고 또한 비아 부모의 사랑도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해주는 부모의 딸인 비아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이 아파서 연극에서 자신의 주인공 역할을 일부러 비아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어기에게는 잭이 있고, 비아에게는 미란다가 있습니다. 잭과 미란다는 어기와 비아의 친구이지만 열등감이 있는 친구들입니다. 잭은 그 열등감을 이전의 친구 집단에서 극복하려 했고, 미란다는 연극에서 능력으로 비아를 이기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리사이가 세리에게 헬멧을 씌우려 하는 오늘 복음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하느님 자녀의 자격을 갖췄음을 믿었고 그 자격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남을 끌어내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자주 말하십시오. 특별히 “아빠!”라고 해 보십시오. 아빠라는 말은 친자녀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지만, 아빠라는 말은 친아버지에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친아버지와 함께라면 그 자존감 때문에 굳이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 자신을 들어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운동회 날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친구를 위해 함께 손을 잡고 걸어서 결승선까지 들어온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장애가 있는 친구를 이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굳이 친구를 이기면서 극복해야 할 열등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하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너희들이 옳음과 친절함,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은 열등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상대가 그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항상 남에게 씌워줄 헬멧을 들고 다닙니다. 하지만 “아빠,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합니다. 자신들에게 함부로 대한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바리사이의 몫이라면, 친절함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느님 자녀라는 자존감을 가진 이들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