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오 5,17-19) - 사순 제3주간 수요일 (2021.3.10.)

honephil 2021. 3. 10. 06:53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고해소에 앉아서 누군가의 고백을 들을 때면 저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평소에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죄라고 생각하여 깊이 성찰하고 용서를 청하기 때문입니다. 고해 사제로서 그런 이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래서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 시대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에 적힌 규정들을 정확히 지킬 뿐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는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가진 삶의 의향과 의도와는 별개로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노력이라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 위선자라는 말이라도 들어 볼 정도로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나요? 자신의 편의에 따라 하느님의 법과 기준의 범위를 넓혔다 좁혔다 하지는 않는가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율법을 폐지하며 살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소한 위선자라고 불리는 그 사람들만큼이라도 하느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에 못 미치는 자신을 보며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한 번이라도 더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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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되고 싶은가, 군고구마가 되고 싶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러 오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밑에 오늘 복음의 핵심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지고 지키지 않으면 불의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와 당신을 통해 율법이 완성되는 하느님 백성의 의로움을 대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며 바리사이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 하지만 믿음의 백성은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는 이들이라고 하시고, 또 바리사이들은 간음하지 않으려 하지만 참 하느님 백성은 음탕한 마음까지도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만났다면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실천하려는 것과 믿음의 백성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의 차이를 명확히 알 것입니다. 그 차이란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되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왜 결국엔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여배우가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 박사요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네 번씩이나 수상하고 여우 주연상 후보에는 무려 열두 차례나 선정된 캐서린 헵번입니다.

 

그녀는 무슨 일을 맡아도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 실적을 올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학교에선 박사학위를 땄고 연기에서는 최고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에서만큼은 완전에 도달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남달리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그녀는 84세에 자서전 “나”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자서전을 통하여 그녀의 사랑관의 변화에 대해 간단히 훑어볼 수 있습니다.

 

      헵번은 나이 20세에 필라델피아의 사업가 러들로 오그던 스미스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6년 후에 서로 갈라섰는데 그녀는 이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루디는 나를 사랑했지만, 나는 나 자신만을 사랑했다.”

 

첫 결혼이 파경에 이른 다음에도 그녀는 자기 위주의 사랑을 이어갑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이혼한 그해부터 제작자 그랜드 헤이워드와 4년을 사귀었고, 그 후엔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와 3년 동안 정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던 햅번이 33세가 되던 1941년 “그 해의 여인”이라는 영화를 함께 출연한 스펜서 트레이시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 이후 그녀는 27년 동안 오직 그 사람만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먹었다.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우린 그가 좋아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내겐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이의 관심, 그이의 요구가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애정관 변화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했고, 다음엔 상대 중심적인 사랑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 마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려고 하는 것 안에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모기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나에게 잘해 주어도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던, 아들을 사랑했지만 결국 며느리를 자살하게 만든 시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떠난 아들에게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도 남의 피를 빨아먹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개신교의 고구마 선교왕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선교할 때 사람들이 두려웠는데 사람들을 고구마로 생각하니까 길거리 선교를 통해 수천 명을 선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찔러보고 안 익었으면 나중에 또 찔러보면 그만입니다.

 

      어째서 사람을 고구마로 볼 줄 아는 것이 사랑이 되었다는 말일까요? 자신이 고구마이기 때문입니다. 다 자기 자신처럼 사람을 보게 되어있습니다. 호랑이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호랑이로 보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고구마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고구마로 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고구마의 일은 먹히는 데 있지 남을 먹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호랑이가 아니라 고구마가 됩니다. 호랑이는 아무리 나에게 잘해 주어도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잘 익은 군고구마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자신을 죽였기 때문에 나에게 영양분을 주고 맛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쓰시는 방법은 당신처럼 우리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생명의 양식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하지 맙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군고구마처럼 사랑이 됩시다. 모기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체는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https://youtu.be/cKGFrQXDBR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오  5,17-19 ) - 사순 제3주간 수요일 (2021.3.1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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