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3-25) - 사순 제3주일(2021.3.7.)

honephil 2021. 3. 7. 07:02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성당을 찾았습니다. 머리는 복잡하고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아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성당을 찾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청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앉아 제대 뒤에 걸려 있는 십자가만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요? 시계를 보니 네 시간이나 흘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고자 성당을 찾습니다. 때로는 위로받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성당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아니면 행복과 즐거움을 얻고자 성당을 찾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그런 곳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위로받고 평화를 얻으며,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바라고 청하고 두드리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가 성전만이 아닌 당신의 ‘몸’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기 전의 제자들처럼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내어 주십니다. 빵으로, 포도주로 당신의 사랑과 희생을 그들에게 전해 주십니다. 바로 성체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가 바로 성전이며, 하느님과 만나는 곳이며,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 행복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곳입니다. 그 성체를 우리가 모십니다. 그 성체를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십니다. 우리 모두, 또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여러분은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의 집이 된 사람, 눈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만납니까? 그 사람의 목소리와 행동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위로와 평화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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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이들은 행복하다: 눈물이 채찍이 될 때>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성전정화’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폭력을 쓰신 유일한 장면입니다. 사랑이 폭력이 되는 경우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죽을 때입니다.

 

      저도 예수님께 폭력을 당해본 적이 있는데 신학교에 들어와서입니다. 사제로 불러주신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왜 내가 이렇게나 많이 바쳤는데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으시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때 내 안에 모신 성체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

 

      나는 내가 가졌다고 착각한 것을 주님께 드린다고 또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진리’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채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채찍은 ‘은총’이었습니다. 은총이 제 안에 있는 장사꾼을 몰아내었습니다. 저는 제가 드리는 것으로 무언가 보답을 달라고 주님과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은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생명을 내어주고 계셨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 채찍이 너무 따가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장사하던 마음은 채찍에 맞아 눈물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게 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나도 누군가를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죽음을 통해 우리 마음의 성전을 정화하시고, 또 우리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정화하는 방법입니다. 눈물과 피는 채찍이 되어 누군가를 장사꾼의 소굴에서 성전으로 정화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때문에 저를 위해 흘리신 눈물로 제가 정화되는 것을 보시고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이기헌 주교의 『함께 울어주는 이』라는 책에는 오래전 당신이 첫 본당에서 사목 하시던 당시의 이런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신부님이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성당을 비워야 했기에 특수 사목을 하는 동창 신부에게 본당을 맡기고 떠나 있어야만 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걱정했던 자매 한 분이 그동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자매에게는 두 아들과 남편이 있었는데, 자매님은 비신자인 남편이 어찌나 고집이 쎈지 그렇게 오랫동안 성당에 가자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주일미사에 나온 것입니다. 아내를 잃게 만든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할 텐데 성당에 나와 본당 신부에게 먼저 “저 예비자 교리반도 시작했습니다.”라며 인사하였습니다.

 

      한 편으로 ‘그렇게 완고하던 분이 어찌 된 일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동안 본당을 맡아준 동창 신부 덕분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그 자매를 방문해 봉성체도 해 주고, 병이 악화되자 정성을 다해 병자성사도 해 주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떠나는 자매님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 신부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사제가 보여준 ‘눈물’이었습니다. 신부라면 늘 하는 일인데도, 자기 본당 신자도 아닌 사람과 그 가정의 슬픔을 마음으로 함께하며 자기 일처럼 눈물을 흘리는 신부가 정말 감사했고 큰 위로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주교님은 책에서 이 말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눈물로 씻겨진 영혼 안에서 위로를 받으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몸이 대신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망친다는 뜻일 것입니다. SBS 스페셜 92회, ‘신이 내린 묘약 – 눈물’(2007)에서는 왜 우는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서울 양천구의 김진성씨.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40대 가장입니다. 군인 장교 출신인 그는 여러 번 사업이 실패해도, 아내와의 이혼위기에서도, 혹독한 사춘기로 방황하는 아들 앞에서도 절대로 울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빠는 감정도 없는 냉혈한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그가 변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우는 모임’을 통해 스스로 마음속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앞에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정이 변하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상처 받았던 아들과 아내의 마음이 아빠의 눈물로 녹아내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이 우셨습니다. 그때 우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웃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쉴 안식을 마련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피와 눈물로 성전을 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눈물로 재건한 성전이 나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자아의 피입니다. 자아는 나를 잡아먹는 뱀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으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생명의 눈물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채찍이 되어 다른 영혼을 정화합니다. 내 영혼의 정화가 곧 다른 영혼의 정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고 나 때문에 정화된 사람은 나의 성전이 됩니다.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안식처가 되어드리며 동시에 자신의 안식처를 눈물로 닦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dHi7-XEBaE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  2,13-25 ) - 사순 제3주일(2021.3.7.)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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