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19)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2021.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오늘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와는 제법 큰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우리 삶의 자리와 베드로 사도좌와의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도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님이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주일만 간신히 지킨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는 이 축일이 큰 의미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은 교황님과 주교님들을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신앙심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온전히 삶을 투신하면서 살기에는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다반사가 예수님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다가올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신앙인이라고 자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신앙인이기에, 부족해 보이는 신앙인이기에 오늘의 축일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적 없으셨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반석 삼아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럼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어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도 풍랑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물에 빠지고,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인공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체험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베드로이기에,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우리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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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는 사람의 것을 양도받을 수 없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맡긴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무엇보다 베드로 교회에 우리가 머물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이상 베드로도 그 교회 밑에 항상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교회라는 건물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이 진정 베드로인가?’는 확인해야 합니다. 베드로 교회라면 분명 베드로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사용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죄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 권한만 있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권한을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주시는 분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에게 그 권한을 주시는 분을 보통 인간으로 보았다면 그런 권한을 주셔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개신교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교회가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들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 아들로 알아보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죄 용서의 권한을 양도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인간이 원숭이를 보듯 했다면 그 권한을 양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원숭이가 인간을 보듯 했다면 그 권한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수준끼리만 권한의 양도가 가능합니다.
1973년 11월, 오클라호마의 연구소에서 새끼 침팬지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님 침스키. 님은 허버트 박사의 프로젝트를 위해 강제로 어미와 이별한 후 스테파니의 집에 맡겨져 ‘인간의 아이’처럼 길러집니다. 당시 언어가 인간이란 종족만이 가진 권한이라는 이론에 반박하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스테파니의 딸 제니와 함께 성장한 님은 언어 교육을 위해 허버트 박사 연구팀의 로라에게 맡겨지고, 수화를 통해 기본적인 단어들을 배우며 놀라운 능력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자 거센 힘을 종종 휘두르며 침팬지의 야성을 드러냅니다. 사람을 공격하여 볼이 뚫릴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실험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허버트 박사는 프로젝트를 중단합니다. 님이 수화를 통해 단어를 배웠지만, 그 단어를 조합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더 큰 님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허버트 박사는 님을 오클라호마 침팬지 연구소로 돌려보냅니다. 님은 그곳에서 다른 침팬지들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단독 우리에 갇혀 살게 됩니다.
어느날 유년 시절 자신을 키워주었던 스테파니가 찾아옵니다. 농장주의 만류에도 스테파니는 님을 만나겠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갔고 죽기 직전까지 님은 보복을 가합니다. 오히려 버려진 자신과 놀아주었던 사육장의 밥이 찾아오자 그는 반겼습니다.
님에게 사람의 말을 배우는 것은 지옥과 같은 고통이었고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 자신과 놀아준 밥은 천국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고 하여 동물에게 이양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양하는 것은 그 가치를 아는 대상에게만 가능한데 하느님 나라의 열쇠도 인간이 아닌 하느님 아들의 수준에만 이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야 그 권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 눈은 하느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특별한 분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분을 하느님 자신으로 볼 시력을 지닌 사람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당신을 소개하셔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볼 줄 압니다.
베드로의 이 시각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블랙’(2005)에서 자신이 짐승인 줄로만 알았던 한 소녀가 한 스승을 만나 인간의 부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의 부모가 인간이라면 자신도 인간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풀과 나무, 꽃과 물이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존에만 집착했던 때와는 다르게 각 물체가 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이 나의 시각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로 새로 태어난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한을 이양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들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이양받고 그것을 행사합니다. 그 권한은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본인이 아직 인간의 자녀라고 믿는 사람에게만 이 열쇠를 맡길 수 있으십니다. 반대로 이 권한을 거부한다는 말은 하느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나 혹은 하느님께서 당신 권한을 당신 아드님께 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줄 수 없겠습니까?
인간이 원숭이에게 어떠한 권한을 받겠습니까? 혹은 원숭이가 인간에게 어떠한 권한을 이양받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만이 인간의 권한을 이양받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권한을 이양받았다면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베드로에게 거룩한 것을 주셨다면 교회가 개들은 아니란 뜻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행사한다면 그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또한, 스스로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권한을 거부한다면 스스로 거룩한 것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묵상]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19)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20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