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코 3,7-12)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청혼을 거절한 데 대한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에 따라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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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아가타, 루치아 성녀와 함께 초세기 4대 동정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녜스 성녀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께 용감히 나아가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과 악에 얼마나 잘 대항합니까?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의 믿음과 형제애를 실천하여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나누어야 함을 알려 주는 요한 1서 저자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1 요한 5,5)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 계명은 힘겹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모두가 세상을 이긴다.’라고 전합니다. 아녜스 성녀는 자신을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박해자들을 세상의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지만, 용기 있는 신앙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증거로 목숨을 요구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피 흘림 없이 신앙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을 참고 견디며, 세상의 악에 순응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용기를 내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은 우리가 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이 외침은 우리가 바치는 희생과 봉사와 애덕의 실천으로 세상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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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잘할 수 없으면 아무에게도 잘해주지 마라>
오늘도 공동체 리더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이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은 리더이십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밀쳐댈 수 있기에 예수님은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시어 그들과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중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도 그분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곤 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한 공동체의 리더십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리더는 ‘편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더 잘 안다는 말은 더 많이 사랑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편애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누군가는 그 가정에서 소외되고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공동체 분열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귀 들린 이들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리더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끔 공동체 분열의 주범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귀의 입을 막으십니다. 또 뭍에 계시면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들만 이익을 보기 때문에 배를 타고 조금 떨어지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다면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게 하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참 리더의 모델입니다.
‘KBS 안녕하세요’ 프로에 「아홉 살인데 몰래 우는 아들」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9살, 4살 두 아들이 있는데 지나치게 차별하는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밥 먹으면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밥을 토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토하냐고 화를 내고 그 아이와 밥을 먹으면 밥맛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진행자들이 큰아들에게 “아빠가 너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물으니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작은아들에게도 그렇게 물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빤 절 사랑해요. 경상도 사람이라 좀 무뚝뚝해서 그래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경상도 사람이고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아빠가 말하지만 작은 아이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핑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교하기 좋아합니다. 자녀는 부모 사랑의 절대적인 양보다 상대적인 양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니 부모가 사랑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차별해서 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편애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은 리더가 다른 이에게 하는 사랑의 최대치가 자신에게도 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고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본당에서 청년들이 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집 센 누군가가 물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제가 본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청년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다른 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회가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따르는 청년들은 소수였지만 결국 끝까지 둘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항상 본받고 싶은 분이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이 정말 대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잘해 주어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세금도 많이 걷고 다른 의무도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불만이 없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못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 잘해줄 수 없다면 똑같이 못 해주라는 것이 세종대왕의 리더십입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나라의 리더가 편애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의견에 휘둘린 것입니다. 최순실 씨의 의견이 다 옳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편애하는 리더일 뿐입니다. 그녀의 파일엔 국가안보 자료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대통령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를 골고루 사랑하고 모두에게 골고루 자신을 알게 하지 않을 바에야 누구에게도 편파적으로 사랑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의 어떤 양반은 하인 둘이 서로 싸우고 왔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자네가 옳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말하자 “자네가 옳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다른 하인이 “주인님, 다 옳다고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둘이 싸운 것인데요.”라고 했더니 “너의 말도 옳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분열은 옳지 않고 일치는 옳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면 다른 이들은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공동체가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에 휘둘린다면 좋은 리더는 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서 조금 떨어져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를 보며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만의 지도자가 됩니다. 지도자는 오직 하느님께만 흔들려야 합니다. 몇몇 사람에게 휘둘리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