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2020.12.28.)

honephil 2020. 12. 28. 06:47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아기 예수님 때문에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뒤 그분의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다음의 네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별을 보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들 살해, 성가정의 무사 귀환입니다. 이 네 사건은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출생과 그 어린 시절을 비교할 때, 나름대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일관성이 있습니다.
탈출기의 처음 장들은 모세의 출생과 청년 시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는 모세와 모든 히브리 남자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탈출 1,16.22 참조). 그러나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고(탈출 2,1-10 참조), 청년 시절에는 이집트인을 죽인 탓에 파라오에 쫓겨 미디안 땅으로 달아났다가 그가 죽자 이집트로 돌아갑니다(탈출 2,15.23;4,19-20 참조).


이러한 모세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은 신약 성경이 쓰일 때 폭넓게 활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이라는 예수님 탄생 예고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언제나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합니다.


출생 배경에 대한 열등감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데 빈틈없고 잔인하였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느님을 거슬러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마는 파라오와 헤로데의 비겁함을 우리는 과감히 던져 버려야 합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이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오늘 함께 나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 티모 1,7).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누군가의 피의 희생을 빚지고 사는 우리들>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순교하게 된 많은 아기 순교자들을 기념합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아기들을 죽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어린 아기들을 죽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동방박사들이 헤로데에게 들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하느님께서는 굳이 별이 사라지게 만들어 동방박사들이 헤로데를 찾아가 새 왕이 태어난 곳을 물어보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기들의 죽음의 근본적인 책임은 하느님께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물론 아기들을 죽게 만든 것은 헤로데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느님은 빛에 대한 악의 세력의 반격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당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살아있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부모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간과 하느님의 생명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 피의 대가로 사는 우리는 그 피에 대한 빚진 마음을 제대로 갚지 않으면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신 분들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버티칼 리미트’(2000)라는 영화는 산을 타는 두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세계 최고의 산악인 로이스는 어느 날, 아들 피터와 딸 애니, 그리고 자신의 대원들과 암벽등반을 즐깁니다. 정상을 향한 모험을 즐기던 이들은 한 대원의 실수로 팀 모두가 아래쪽에 있던 애니의 자일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 대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마지막으로 위에서부터 애니, 피터, 로이스가 매달리게 됩니다.

 

      애니가 절벽에 박아놓은 유일한 캠이 뽑히면 셋이 다 죽을 판입니다. 그런데 점점 그 캠이 뽑히고 있습니다. 아버지 로이스는 침착한 어조로 피터에게 자신에게 묶인 자일을 자르라고 강요합니다. 아들이 아버지 생명 줄을 잘라야 하는 상황입니다. 동생 애니는 안 된다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동생까지 죽일 거냐고 하며 피터에게 빨리 줄을  자르라고 합니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찰나의 순간 피터는 아버지의 생명 줄을 자릅니다.

 

      자신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생각에 피터는 더는 산을 타지 못하고 사진작가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동생 애니는 마치 산을 타다 아버지처럼 죽겠다는 듯이 무모하게 산을 탑니다. 어쩌면 오빠와 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것입니다. 이것이 각자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푸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3년 후, 무모하게 한 사업가의 K2 산악등반을 쫓아갔던 애니는 얼음 틈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에 오래 갇혀 있으면 산소 부족과 추위, 낮은 기압으로 폐가 상해 죽고 맙니다. 애니는 근처에 있는 오빠에게 자신들만의 구조 신호를 보냅니다. 하지만 언제 눈사태가 나는지 모르는 그 장소에 누구도 가려 하지 않습니다.

 

      피터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다시 산을 타기로 합니다. 동생도 자신의 약을 더 약한 이에게 주며 희생하고 참아냅니다. 하지만 그 사람마저 죽자 그 사람의 피를 받아 눈 위로 뿌려 자신들의 위치를 알립니다. 피터도 동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동생을 끝내 구해내고 맙니다. 이 사건을 통해 둘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던 그때의 죄책감을 씻어냅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왜 죽어야 했을까요? 이는 어쩌면 우리가 모두 누군가의 피 흘림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모세가 살아남아야 했을 때도 많은 아기가 물속에 던져져 죽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중 어떤 누구도 부모의 피 흘림 없이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피 흘림으로 태어났고 아버지의 피 흘림으로 자랐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렇게 누군가를 피 흘리게 했다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부모의 나를 향한 피 흘림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또 자녀를 위해 피를 흘려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해결하는 방법은 나도 아버지처럼 동생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뿐입니다. 이 마음을 주기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나의 생존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어김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또 누군가를 위해 피를 흘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신 것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피터도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야만 아버지를 웃으며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죄 없는 아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태어남 때문에 죽은 그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것으로 그 죄책감을 잊으려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들과 똑같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들을 기쁘게 보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그 아이들의 피 흘림은 그리스도를 향한 아버지의 피 흘림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피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어쨌건 우리도 그리스도의 피 덕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담처럼 또 그분 십자가 앞에서 숨어야만 할 것입니다. 죄 없는 아버지의 희생으로 살게 된 자녀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도 피를 흘릴 수 있었을 때 그 죄책감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 또한 죄 없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죄책감을 이웃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피를 흘릴 수 있을 때 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피로받은 생명은 피로만 갚을 수 있고 그 때야만 나를 위해 피 흘린 분을 죄책감 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희생으로 아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듯이, 우리의 피 흘림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jvbeOSbeLuk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2020.12.28.)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