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0.12.7.)

honephil 2020. 12. 7. 08:15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트레비리(지금의 독일 트리어)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공직 생활도 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다. 그는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는 한편,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기도 하였다. 397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겨울에 비가 내리고 여름에는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집들은 지붕이 평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난 계단을 통하여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한낮의 열기를 피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농작물을 펼쳐 놓고 말리기도 하였습니다.


옥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지붕은 삼나무나 향백나무로 만든 긴 막대기를 대들보처럼 걸쳐 놓고 그 위에 짚을 깐 다음 마지막에 진흙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겨울비가 내리기 전에 돌로 만든 굴림대를 이용하여 진흙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이런 지붕은 마르코 복음서 2장의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에서처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같은 장면을 전하는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 루카 복음사가는 이스라엘의 기후와 토양은 물론 집 구조가 낯설었기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사가들은 중풍 병자를 도우려 한 이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가려고 얼마나 노력하였고 그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였는지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눈먼 이들의 눈을 여시고, 귀먹은 이들의 귀를 여시며, 다리저는 이를 사슴처럼 뛰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의 혀가 환성을 터뜨리게 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인 지금, 주님을 만나고자 얼마나 열성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이웃과 함께 되돌아봅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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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가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과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내용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시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병이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을 고칠 기적을 할 수 있음은 믿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일까요? 그러면 너무 쉽게 죄를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용서받으면 자신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없어집니다. 용서받으면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는 죄를 짓지 못할 것을 압니다. 죄를 짓는 것 안에는 반드시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운전병 훈련을 받을 때 어떤 바람둥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수십 명의 여자와 잠자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온 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이 스물이 갓 넘어서 50명 넘는 여자와 사귄 것입니다. 그의 집은 꽤 부자였고 부모는 커다란 식당을 몇 개 하고 있었으므로 밤늦게까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을 집에 데려와서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그러면 첫 경험은 언제냐고 물으니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구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가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나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첫 경험을 했는데 그 누나는 아무 남자나 데리고 가서 잠자리하는 평판이 아주 안 좋은 그런 여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첫 경험이 그런 여자에게 빼앗긴 것이 그의 마음속에 큰 분노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누나와 똑같은, 아니면 더 나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언젠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자신의 결심으로 그런 삶에서 되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가 그런 문란한 삶을 사는 힘은 자신을 더럽혔다고 믿는 그 누나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지금 짓는 죄들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누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항상 그 분노가 또 다른 죄를 쉽게 짓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누나를 용서하면 그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 죄의 원인인 누나를 용서하겠다는 말은, 마치 속옷이 더러워서 겉옷으로 그것이 나타나는데 겉옷을 벗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겉옷을 벗어야 속옷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여자에게 다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 찾지도 못할뿐더러 모두에게 용서를 얻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할까요? 이때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하였을 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려면 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그 표징을 먼저 찾습니다. 아내와 다투었다면 남편은 장인·장모에게 먼저 용돈을 드리고 옵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남편이 들어올 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합니다. 그때 남편은 자신이 잘못한 것의 용서를 청합니다. 아내의 용서 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거절당할 수도 있기에 그러한 사인이 없이 무조건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표징은 바로 ‘병이 치유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을 인간에게 맡겼다면 인간을 통해서도 죄를 용서해주시겠다는 표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병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고 그것을 믿으라고 기적을 행하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자녀가 부모가 주는 밥은 매일 먹으면서 부모가 자신은 용서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를 보면 둘을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었어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인간에게 주실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힘으로 기적도 일으키고 죄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께서 그 안에 앙꼬와 같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빼고 주셨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깎아내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도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능력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쉬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주시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사실 기적을 행하기보다 더 쉬움을 압니다. 우리는 기적은 못 해도 이웃의 잘못을 많이도 용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더 쉬운 것은 안 주시고 더 어려운 기적의 능력만 주셨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다 주시지 못하는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며 직접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합니다. 이런 오류를 통해 진짜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지금 지은 죄를 분명히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또 누군가를 용서하는 힘이 됩니다. 대부분 우리가 짓는 죄의 근저에는 부모가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랑을 받지 못한 분노가 있습니다. 결국, 그 분노의 불을 끄기 전까지는 지금 짓는 죄들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 분노 때문에 지은 죄들부터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완벽한 하느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주셨지만 분명 상처도 주셨을 것입니다. 교회에 기적을 행하는 능력인 성령을 주셨으면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죄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깨끗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이 힘이 내 근저에 있는 죄의 핑곗거리를 용서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죄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이 죄의 값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가 고통임을 알고 벗어나고 싶다면 우선 죄의 용서를 믿고 죄를 온전히 용서받읍시다. 그리고 그 목적이 내 안에서도 미움이 남아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면 결국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핑계가 사라지고 용서해주신 분에 대한 감사가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znw-iAOBJUI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0.12.6.)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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