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2020.6.30.)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2005년 외국의 어느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최소 30명이 숨지고 45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천여 명의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는 중이었는데, 무대 커튼에서 불씨가 피어올라 화재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대형 참사로 번진 것입니다.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화재에 놀라 긴급히 대피하는 과정에서 발에 밟혀 숨졌다고 합니다. 화재 자체보다도 발에 밟혀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 발에 밟혀 숨진 사람들이 더 많았을까요? 어쩌면 화재보다도 화재에 따른 지나친 걱정과 공포심이 오히려 더 큰 인명 피해를 낳았는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하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22%는 걱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며, 4%는 자신이 전혀 손쓸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걱정 가운데 96%는 지나치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결국 걱정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나머지 4%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지나친 걱정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풍랑이 이는 것을 보고 ‘죽을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지나친 걱정에 사로잡혀 ‘지금 죽을 지경이야.’ 하고 신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으로 신음하느니, 그럴 때일수록 하루하루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지나친 걱정이 불러일으키는 화를 면하지 않겠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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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성과향상 코치인 앤서니(토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란 책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 안에 잠들어있는 거인이 있음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 안에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한 번도 문질러보지 못한 채 먼지만 쌓이게 내버려 둡니다. 우리 안에 잠든 거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서 문지르기만 하면 거인은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거의 배가 침몰될 위기가 닥치자 비로소 예수님을 깨웁니다. 이 배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 안에 잠든 거인인 예수님이 사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못 하시는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우리 안에 잠든 거인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당연히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니 혼자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그 동굴에 들어가기 위한 “열려라. 참깨!”의 주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술램프는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굴의 입구를 통과하려면 올바른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 주문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문을 외우면 바위 문은 반드시 열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나,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 것이나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하면 다 돼요.”라고 말하면, “기도해도 잘 안 되던데요?”라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경우는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하려고 하면서 청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나를 봉헌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힘을 빼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을 때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는 예수님을 깨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힘을 완전히 빼지 않으면 기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온전히 맡기듯이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기도가 시작됩니다.
두 번째는 될 때까지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열려라. 참깨!”하고 ‘안 되네!’라며 뒤돌아섰을 수도 있습니다. 문을 열고 동굴 깊숙한 곳에서 램프를 찾아내어 손으로 문질러야 합니다. 믿으면 끝까지 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기도가 들어지지 않은 때가 없는 이유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믿음을 신학교 때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제가 보답하기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시험 기간이 되어도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이상하게 공부하는 시간이 부족한데도 성적은 잘 나왔습니다.
유학 가라고 했을 때도 이탈리아어로 인사할 줄도 몰랐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다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자마자 ‘하루 세 시간은 성체조배 한다.’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한국에까지 “전삼용 신학생은 공부는 안 하고 성체조배만 한다.”라는 소문이 났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공부도 빠르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했다면 훨씬 힘들었고 훨씬 늦어졌을 것이 확실합니다.
강론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성체조배 한 시간만으로 부족할 것 같아서 미리 걱정합니다. 그러나 한 시간 묵상할 때 강론 거리를 안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기도하면 다 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내 안에 잠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깨우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내 힘을 빼고 믿고 꾸준히 기도하면 다 들어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내 안의 잠든 거인은 바람과 호수까지도 꾸짖어서 복종시켜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다 된다는 생각은 옳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