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2020.6.20.)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사제품을 받고 나니 제 어머니의 귀가 세 배는 커지신 것 같고, 아버지의 시력도 두 배는 좋아지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어떤 강론을 하였으며 요즘에는 무슨 일로 바쁜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될까 봐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하십니다. 한 번은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주로 바치는 성무일도를 어떻게 바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지만 부모님도 덩달아 그 삶의 일부를 떠안고 계시는 듯합니다.
사제의 부모가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숙명과도 같은 삶을 생각해 보면, 왜 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 성모님을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에 함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성모님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십니다. 성모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서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이 삶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머무르셔야 할 자리에 함께 머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마치 사제의 부모가 사제가 머물러야 할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시어 자식을 바라보며 사셨기에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분이 되셨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주신 말씀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1)
예수님도 사춘기 겪으셨음을 이제 확신하게 됩니다. 열두 살에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 고맘 때가 정말 무섭습니다. 안하무인입니다.
돌아보면 본당에서도 어린 친구들이 무서웠었네요. 눈 똥그랗게 뜨고 막 대듭니다. ‘신부님이 그래서 혼자 사는 거예요.’ 뭐 그런 식으로 진땀 흘리게 만들죠. 그래서 비위 살살 맞춰 줘야 합니다. 지난주에는 멀쩡하던 녀석이 이번 주는 싸늘합니다. 아, 어디로 튈지 몰라요. ‘라파엘, 너 지난 주일에 어디 갔었니. 안보이데.’ 나름 친절하게 관심을 표명한답시고 물어보잖아요. 그러면 그러는 거예요. ‘관심 꺼요.’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이런.
사춘기 그렇게 무섭습니다. 예수님도 보면 사춘기 시절 만만치 않으셨네요. 소년 예수의 가출 사건-이라기보다는 실종사건을 보면 알게되죠. 그런데 이 실종은 자발적 실종입니다. 사실 가출이 아닌 것이 소년 예수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나자렛 고향집만 내 집이 아니었던 것이죠. 예루살렘 성전도 당신의 집, 아버지의 집이라고 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러니까 이런 친구는 괜찮은 거 아닌가요. 가출 하면 피시방, 찜질방 이런데 전전하는데 예수님은 이를테면 성당으로 가출한 것이죠. 성당에서 신부님하고 맹랑하게 신학 토론을 벌인 거다-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시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해마다 실종 아동이 이래저래 7000-10000명에 이른답니다. 정말 부모로서는 미칠 지경이겠죠. 멀쩡하던 아들 생떼같은 딸이 없어졌을 때, 모든 일을 다 전폐하고 전단지 붙이고 온갖 시설 다 돌아다니고 아이 찾기 위해 삶을 포기하고 헤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압니다. 그 애타는 마음, 미어지는 마음을 어찌 알까요. 그런데 온 길을 되짚어 아들 찾았을 때, 끌어안고 이놈아. 어디 갔다 왔니 밥은 먹었니.. 쓰다듬고 울고 불고 하는데 아들 녀석이 태연하게 그랬다는 거죠. 왜 찾아왔냐고. 난 여기가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데.
괘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어이가 없는 것이죠. 보통의 경우. 찾고나면 ‘엄마’하고 얼싸안고 눈물 콧물 뒤범벅되어야 자연스러울 텐데. 그런데 소년 예수는 어미 아비의 심정을 몰라줍니다. 이건 내 자식이지만 정말 심한 거 아니까요.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그런데 말문이 막힌 그 상태를 일컬어 성경은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간직하였다’고 그러는 겁니다.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인지는 몰라도. 상처 투성이 성모성심인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아비어미가 그렇죠. 자식 때문에 속상하고 고생하고 잠 못 들고 그리고 버림받기도 하고. 이 사랑은 일방적인 원사이드 러브예요. 되돌려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돌려 받을 가망성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 퍼부어보아야 밑빠진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끊임없이 퍼붓는 그 마음. 내 아들이지만 내 아들로만 둘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내어놓는 그 마음. 그래도 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마음. 끈끈한 그 모정을 신앙이 감싸면서 점차 점차 완성되어 가는 그 마음. 엄마의 마음이죠. 또 아빠의 마음이죠.
‘신자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아주 이용해 먹을려고 그런다’고 그러니 ‘적당히 밀고 당기도 그래야 해.’ 야무지고 똑똑한 동기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 맞아, 너무 잘해주지 말자. 결국 남는 것은 후회와 상처라고.’ 그런데 그러면 어쩌랴. 어미가 아비가 자식이 제 맘 몰라준다고 덜 주고 덜 마음 쓰는 법이 없으니.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다는 것은 그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봉헌하는 것임을. 그 모든 것들을 담아둔 마음이 아무리 무겁고 힘들고 아프질지라도.
남상근 라파엘 신부
~~~~~~~~~~~~~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티 없이 깨끗하신’이란 수식어가 붙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원죄까지도 없으시기에 ‘죄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죄가 없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발레를 포기하였기에 자신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누군가와 깨끗하지 못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머니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밤새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행위를 다 보았는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산 외가댁에 처음으로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단 어머니와 외가 친척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투리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삼촌들에게 저를 맡기고 가신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잘못 들었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밑에 층에서 목욕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척 불안했었습니다. 외가댁은 목욕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찾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더는 찾지 않았습니다. 죄가 커지는 사춘기 때부터였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안 좋은 비디오를 보다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테이프를 빨리 빼곤 하였습니다. 부모의 법이 아니라 내 안의 법을 따를 때는 이렇게 부모를 찾지 않을뿐더러 그분이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죄가 커질수록 부모를 찾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죄와 반대되는 법을 가지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잃으셨습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찢어지듯 아플 것입니다.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자녀를 찾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꼭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이사 26,9)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밤새 찾고, 아침이 되어서도 찾으려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와 반대되는 법이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자신에게 없는 심장을 찾겠다는 양철 나무꾼이 있습니다. 왜 심장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심장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이미 거룩한 마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라. 그러면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해바라기가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의 어둠에 들지 않습니다. 죄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분의 법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고 나니 결국 ‘아버지 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님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이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고 또 벗어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간절히 찾는 마음이 곧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