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2020.6.13.)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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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수도자나 성직자들은 서원식 또는 서품식 때에 서약을 합니다. 또한 평신도들도 세례 때에 서약을 합니다. 그렇다면 맹세를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에 사용된 ‘맹세하다’의 그리스 말 ‘옴뉘오’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근거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이 맹세를 할 때에도 이 낱말을 사용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를 합니다(루카 1,73; 히브 3,11; 6,13 참조).
예외적으로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 맹세를 하는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헤로데로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마르 6,23 참조). 다른 한 사람은 베드로인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대사제의 저택에 끌려가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맹세를 합니다(마르 14,71 참조). 이렇게 볼 때 맹세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늘, 땅,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를 하기에 사람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면, 이는 하느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저 우리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에는 “예.”라고 응답하고,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에는 “아니요.”라고 순명하는 것뿐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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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2020년 6월 13일 토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마태 5, 33-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 37)
오늘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학자 기념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매 순간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부류 가운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가장 약속을 잘 안지키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국회의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 대통령이기 때문에 언제나 이들이 약속을 하면 정말로 지킨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신문에 나온 기사는 모두가 사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오보는 없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사실과 객관성에 기초해서 보도를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오보도 있고 기자의 양식이나 수준에 따라서 신문사의 성향에 따라서 한 사건을 두고서도 다양한 보도 양식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 것’ 이 사회생활을 잘 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믿기 어렵고 가슴 아픈 말이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주장이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과 다름이 없었나 봅니다.
우리는 많은 맹세를 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주장의 옳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두고서 맹세하는데" 등의 말을 자주합니다.
구약을 보면, 두가지 종류의 맹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자기주장의 증인으로 내세우고 엄숙하게 말하는 것인데 , 이것을 보통 ‘맹세’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뭔가를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것인데, 이것을 ‘서약, 혹은 서원’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자기의 주장의 옳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맹세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을 두고서 맹세를 하고서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을 거짓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거짓에다가 신성모독까지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고서 맹세하는 대개의 경우는 다급할 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참으로 옳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맹세를 남발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두고서 맹세하지 말하고 하신 이면에는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것들입니다.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것을 두고서 즉 자신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는 것을 걸고 맹세를 한다는 것은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다. (마태 5, 35) 고 말씀하십니다. 이말은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에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 37)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의사를 표현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갖고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예’라는 답을 하고 살아야 하고 사탄 앞에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하는 답을 단호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주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분명한 태도를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과 합당하지 않는 것에 대한 ‘예’와 ‘아니오’의 분명한 태도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때문에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을 하는 하루를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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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가장 믿고 신뢰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결국,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제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절대로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으로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하느님만 할 수 있는 부분이지 인간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으니 하느님께 신뢰해야지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을까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뢰의 정도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 신뢰를 나 자신에게 주는 만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제 생각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결국 진리를 보지 못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자신만을 굳게 믿는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에서 형은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찾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함께 살던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기에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동생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살합니다. 범임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남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들의 착각이 처음부터 이 결말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예화를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 영화를 너무 모든 것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잘 살았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온 이들은 악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만 청하며 살았던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돌아가시기 직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믿음도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한쪽에 쓰면 다른 쪽에 쓸 힘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자기 자신과 주님도 그렇게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 신뢰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나’는 ‘내가 믿는 나’가 아니라 내가 믿는 나를 믿을 것인지, ‘나는 나다’라는 주님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나’입니다. 이렇듯 ‘참 나’와 ‘자아’, 그리고 ‘주님’이 구별될 때 비로소 자아에만 신뢰를 주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와 주님 사이에서 나의 신뢰를 어느 쪽에 줄 수 있는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님을 믿어도 결국 자아가 만들어낸 우상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100%의 신뢰를 자아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이란 책에 헤펠이란 운동을 아주 싫어했던 한 여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여자는 달리기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50년 동안 뚱뚱하게 살아온 자신을 합리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고 왜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마라톤을 완주하게 됩니다. 건강해진 것은 이루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며 크고 작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믿는 나의 믿음에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한 번쯤은 믿고 실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신뢰는 나 자신에게서 조금씩 주님께로 옮겨가게 되고 그만큼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