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2020.6.11.)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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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정녕 위로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둘 생각으로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바오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흘 동안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불신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찾아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정식으로 선교사가 되지 못한 채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바오로는 비로소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이가 바로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모든 신자가 바오로를 두려워할 때 바르나바만이 그를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인도해 줍니다.
또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었을 때 그곳과 가까운 타르수스에 가서 바오로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외로움 속에 있던 바오로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뿐 아니라 소아시아 일대를 함께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합니다. 이렇듯 바르나바는 바오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건넨 은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바르나바는 어떻게 ‘위로의 아들’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밝힌 본문이 없습니다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아마도 바르나바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을 두고두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 바오로에게 다가가 그를 믿어 주고 인도하였을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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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아마도 이름대로 이웃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주는 것을 받는다.’라는 것은 하나의 흔들림 없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내가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하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좋은 것을 주라고 파견받지만 박해와 모욕과 죽음을 받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내가 주지 않은 안 좋은 것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잘해 줘 봐야 보람도 없다며 잘해주기를 멈춰야 할까요? 그러나 주는 것은 반드시 다시 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만 합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많은 기적도 행했지만, 또한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바닷가 마을은 안토니오 성인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모여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바다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물들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게 하심으로써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위로하기 위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위로로 다시 갚아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100명이 들을법한 설교인데 1명만 듣는다면 99는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성 프란치시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행복론은 더 특이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느니보다는 주님께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성인들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법칙을 아셨습니다.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께서 그 대신 더 큰 열매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남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데 지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을 나의 목에 칼을 댔다면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이웃이 어떠한 반응을 하던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으면 받아서 좋고, 거부당해도 나는 사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사랑이 거부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위안으로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1부터 100까지 차례대로 합한 값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1+2+3+4+…+99+100’ 이렇게 하나하나 더해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다 더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놀라며 값을 물었습니다.
“5050입니다.”
10살 때 이 문제를 푼 소년의 이름은 19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될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습니다. 가우스는 무조건 1부터 100까지 더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100=101, 2+99=101, … , 99+2=101, 100+1=101”
1부터 100까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더하면 항상 101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1이 50개가 생기니 101×50=5050이 나옵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것에도 이러한 법칙이 숨어있습니다. 결코, 내가 하는 수고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않고 끝나지 않습니다. 1밖에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황금으로 도금된 100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만들어놓으신 법칙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결코,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거부당한다면 더욱 기뻐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결과만 보고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