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연중 제9주간 화요일 (2020.6.2.)

honephil 2020. 6. 2. 07:33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주시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들은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이 대답은 맞는 것이었을까요? 황제는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누가 황제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 아니십니까? 세상에 어찌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신앙적인 것은 종교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황제의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가 복음의 빛을 받아 각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된 정치 문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2246항 참조). 부조리와 불평등, 억압과 폭력으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모든 이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라고 선을 긋고 무심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쓰시는 만큼 교회는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태도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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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에 읽는 말씀

2020년 6월 2일 화요일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지 않는 지혜 (마르 12, 13-17)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르 12, 15)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일어난 가장 불행한 사건 중의 하나는 바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이 분열과 불신의 조장이라고 한다면  이 사탄의 전략은 백 프로 이상 성공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불신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신이 낙원의 삶을 고행의 삶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신뢰 회복의 출발점은 바로 자신이어야 합니다. 상대의 변화를 통해서가 아닌 나의 변화를 통해서 만이 가능합니다. 세상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자유하는 사람은 세상의 종으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바오로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할 때 '종' 은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표현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종인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참으로 자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떨어져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는 자유 하지만 이제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명예와 돈과 권력 등등을 추구하다 결국은 이들의 종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시는 것을 보고 난 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앨까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모든 일들을 무슨 권한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우문에 현명하게 답을 하십니다. 언제나 형식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의 태도에 상응하는 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참'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집요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제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들의 질문 속에 담겨진 의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 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들 마저도 예수님의 대답에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것' 을 분별하는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곁들여서 받게 된다 (마태 6,33)는 것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곁들여서 받게 될 것을 원래 받을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추구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 등등은 저절로 받게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원한다면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 (잠 9:10) 는 말씀은 우리가 왜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은 지성과 자유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느님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분이심을 묵시록 3장 20절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하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지 않아도 언제든지 당신의 뜻대로 들어오실 수 있는 분께서 우리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바로 이 기다림이 사랑이고 이 사랑이 지혜를 가져다 줌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듯이 이웃을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닌 인격적으로 대하며,  하느님의 나라와 의로움을 먼저 추구하면 곁들여서 받을 수 있는 것을 그것 때문에  원래 받을 것조차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거룩한 하루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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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것으로 올가미를 씌우려고 시도합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기당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보좌 신부 때 사기를 당해 물건을 엄청나게 산 일이 있습니다. 추석 즈음에 한 백화점에서 영화를 보고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냉동탑차가 도로에서 제 차 옆으로 오더니 잠깐만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길가에 세웠더니 자신들도 그 백화점에 납품하는 사람들인데 물건이 남아서 싸게 팔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어놓은 물건은 제주 옥돔이었습니다. 얼음 위에 재워진 옥돔은 정말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백화점에서는 35만 원에 판매되는 것인데 4만 원에 사라고 했습니다. 자신들도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바빠서 내려갈 수 없어서 그렇게 남은 것들을 팔아 소주라도 한잔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면 여러 가정에 선물을 해야 해서 10박스를 샀습니다. 수녀원에도 주었는데 수녀님들이 옥돔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져갔더니 온통 얼음으로만 채워져 있고 위에 3마리 정도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몇 마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20마리 정도 있다고 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사제가 사기 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해버렸다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저는 돈이 넉넉하지 못한 보좌 때였기 때문에 사기를 더 당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애정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니까 그만큼 싸게 판다는 것에 대해 더 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싸게 사기 위해 사기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100원짜리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굳이 싸다고 돈을 쓰지 않습니다. 돈이 더 넉넉해졌는데도 사기당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 것입니다. 무엇이 넉넉할 때 덜 미혹됩니다. 친구가 많을 때 애정에 덜 미혹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기꾼들은 그 사람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만약 전화금융사기를 치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녀가 다쳤다고 해서 당황하게 만듭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당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민감한 것이 많은 이들은 많은 사기를 당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믿고 보증을 서주거나 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인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인간 애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뿐입니다. 재물이든 사람에 대한 애정이든 자신이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기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민감해지지 않는 방법은 넉넉하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만약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다인들에게 매국노처럼 취급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란세력으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이란 세상의 욕구입니다. 세상의 욕구는 세상에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모든 바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바라기 위한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을 욕망할수록 하느님 것을 덜 욕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 것을 욕망할수록 세상 것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에너지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는 무관심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 편을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하느님 편을 들으셔서 그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면 부족한 것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있을 때 아이들이 세상 어떠한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것을 귀찮아해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면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못 받는 대신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그 아이는 엄마를 버리고 그 스마트폰을 내미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지면 자녀들은 그렇게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에 미혹되어 사기당하고 이용당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만을 믿는 아이라면 자신을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겁을 먹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미혹되는 일이 없는데 그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당하지도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길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https://youtu.be/HtJqZi1ISl4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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