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2020.5.28.)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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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의 정신을 가다듬는 기도입니다. 본디 구약의 대사제의 기도를 각색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속죄일에 대사제가 하느님과 백성이 화해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드렸던 기도를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기도입니다.
하나 됨의 기도의 본질은 ‘화해’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저버리고 제 잇속과 욕망에 휩쓸려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본디 모습조차 잃어버린 시간들을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내어놓고, 오늘을 다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담아내는 기도가 하나 됨의 기도입니다.
요한 복음은 그 하나 됨의 원천을 ‘사랑’으로 제시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존중합니다(1코린 13장 참조). 규칙과 조건을 내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께서 하나이시듯, 믿는 이들이 하나 되는 유일한 조건은 그저 사랑하는 일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로 껴안아 주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위한 행동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있다는 방증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오로지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이웃의 부조리를 심판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모습으로 정립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들먹입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자유로운 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이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랑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과 하느님은 하나가 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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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에 읽는 말씀
2020년 5월 28일 목요일
하나됨을 위한 기도 (요한 17, 20 - 26)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 21)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는 삶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기중심으로의 하나를 원합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는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특징은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분열, 인간 사이의 분열이 바로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령의 특징은 하나 됨입니다. 자기 중심적이 아닌 하느님 중심적인 하나입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가 삶의 주인이 되는 일치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별 기도에서 우리 모두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직접 해당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1절에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하나가 된다 함’은 같은 이해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치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성부로 부터 파견된 구세주이심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되게 하지만 사탄은 우리를 분열시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서 일을 하는지 분열시키고 있는지를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드러나게 한다든지 정의를 주장하면서 사랑이 결여된다든지 함으로써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 같이,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영광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이란 아버지의 사랑 (23절) 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 (24절)을 말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 전제는 ‘하나 됨’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하나 됨이고 우리 사이의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 22)
예수님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들에게 이 영광을 준 이유는 믿는 사람들이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23절의 말씀은 22절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 23)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하나 됨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아버지와 일치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끼리의 일치는 불완전하지만 완전자 안에서의 일치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이 사랑을 우리들은 삶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되면 이들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법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예수님을 믿으시오!’ 하고 외치는 구호가 아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보여주어 이들이 이 사랑을 알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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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는 살인 누명을 쓴 바보 아들을 살리기 위한 엄마의 사투를 그린 영화입니다. 엄마는 자기는 생각하지 않고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처음엔 아들의 유일한 친구를 의심하여 그의 골프채를 훔치고, 그다음엔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를 찾아가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려 합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목격자는 살인의 범인이 엄마의 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엄마는 아들을 위해 그 할아버지를 살해합니다. 나중에 풀려난 아들은 그 할아버지 집에서 엄마 물건을 찾아 가져다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이용했던 것임을 알게 합니다. 엄마가 5살 때 박카스에 농약을 타서 자신을 마시게 하려던 것에 아들이 엄마를 이용하고 복수한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엄마가 자신의 자녀가 잘되게 하려고 남의 자녀에게 약간의 피해를 주어도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내 자녀가 1등이 되게 하려고 다른 자녀들은 1등씩 밀려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봉준호 감독은 그런 엄마들 속에서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 같습니다.
엄마는 자녀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자녀를 위해 자기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어떤 때는 엄마가 자신을 먼저 돌보지 않는 것이 자녀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일단은 자기중심적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지금 아버지께 기도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 아버지께 청하는 기도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라고 청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여기에서 ‘영광’이란 단어는 ‘성령’을 가리킬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름, 말씀, 영광, 사랑, 물, 피’ 임을 알면 요한복음을 이해하기 매우 쉽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아드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르단강에서 그랬고, 부활 때도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당신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 말씀하실 수 있으셨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물론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과 40일간 머무시며 그들을 가르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먼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죽은 사람처럼 되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통하여 먼저 자신이 행복해지도록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룩’도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을 위해서는 어쨌거나 성령 앞에서 우선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행복한 이기주의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행복을 이제 제자들이 아닌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될 이들에게 확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라고 하시며 당신 중심에서 밖으로 점점 그 범위를 확대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받으신 ‘아버지의 이름’, 즉 ‘사랑’을 통해 마치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서 그러하신 것처럼 당신을 믿는 이들 가슴에 머무십니다.
어떤 분들은 본당에서 봉사하시며 사랑과 기쁨을 잃기도 합니다. 자신밖에 봉사할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봉사하며 일만 시켜놓고 관심을 두지 않는 본당 신부와 게으른 다른 봉사자들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봉사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쁘지 않으면 성령을 받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봉사는 자신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봉사를 접고 조용히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휘어지는 나무는 고추나무를 똑바로 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앞에서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행복은 나를 통과해서 흘러가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먼저 자신을 도와주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