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 부활 제6주일 (2020.5.17.)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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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함께 머무시고 그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런 일치를 도와주시는 분께서 성령이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성령께서는 그 말마디의 본디 의미에 따라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불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 낙담하고 슬퍼하는 1세기 말엽의 신앙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하여 일깨웁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우리 신앙인의 삶 안에는 홀로 버려지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한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 사이를 ‘알맞은 협력자’로 규정하셨고(창세 2,20 참조), 성령께서는 서로서로 도울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함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도 2장 참조).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정의와 불의의 대립으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선을 지향하되 악을 만나 회개로 이끌고, 정의를 외치되 불의함을 함께 아파하며 고쳐 나가고, 진보의 개혁을 보수의 가치로 함께 고민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회개 안에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함께 살아가게 하시려고 오늘도 성령께서는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가로막는 것은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를 가로막는 것이고,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단죄는 그 일치에 가장 큰 걸림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물리쳐야 할 악마가 아니라 회개와 용서로 보듬어야 할 작은 이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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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2020년 5월 17일 일요일
부활 제6주간 (요한 14, 15-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14, 21)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머리로는 말하면서도 나는 참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가, 나의 이러한 감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하지만 문득 ‘내 신앙을 타인에 전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고유한 관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보편적인 관계, 즉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라 생각됩니다. 한계에서 영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산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전에 그냥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하고 나에게 물어봅니다. 갑자기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니까 답이 궁해집니다. 신자들에게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고 수없이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물어보니 쉽게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 14-15)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하면 사람들이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와 일반 사람과의 차이는 바로 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방법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십니다.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합니다.
필립피서 2장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를 이렇게 말해 줍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필립 2, 6-9)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시지만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회적으로 조금이라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과의 관계의 끈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또한 그러한 끈이 있음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갖고 있었던 최고의 관계의 끈을 우리를 위해서 끊으셨습니다.
둘째로 당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는 이 엄청난 포기를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에게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그 지위를 포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아는데 예수님께서는 주인이신 분이 종이 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일반 사람처럼 되신 것에서 더 나아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으십니다. 그것도 가장 비참하고 모욕적인 형벌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 놓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드높이 올리십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보호자 성령(parakletos)을 보내 주십니다.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말은 우리 옆에서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 주시는 분, 혹은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가르쳐 주시고 매 순간순간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기 위함이고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이 크신 사랑을 마음에 담습니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탁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