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부활 제5주간 금요일 (2020.5.15.)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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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길을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예수님 덕택에 우리는 예수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된 것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관계라는 것이 참 신비롭습니다. 한 사람을 좋아하고 의지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삶조차 파탄 나고 어지럽게 될 때가 있는가 하면, 파탄 난 삶이 새롭게 고쳐지고 다듬어져 더욱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실은 둘만의 일이 아니라 둘의 만남 속에 드러나는 기대하지 않은 창조 활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 생각이 분명 다른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나의 새로운 생각으로 거듭나기도 하다가, 생각이 같아서 만났는데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합니다.
둘의 만남은 늘 또 하나의 다른 존재를 불러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안에서 수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을 소개하시고 선포하시며, 그 아버지와 한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창조적 자리를 함께 얻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예수님과 한 분이신 아버지의 자리도 마련하는 여유로운 일입니다.
서로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 마음의 자리는 더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날수록 사랑의 마음은 더 커져 더 많은 이를 품고 껴안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관계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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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복음 15장 12절)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종종 성인(聖人)들의 생애를 통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옸습니다. 청소년들의 벗이요 스승이요 아버지셨던 돈보스코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면서,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목숨바쳐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동시에 아이들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돈보스코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살짝 맛볼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기쁘게 해 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평생 간직하고픈 멋진 추억의 사진들을 남겨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영혼을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그는 아이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마주 앉아 있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십니다.
태어난 지 한달 정도 된 아기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 누울 수도,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먹여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 아기는 부모에게 아무것도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부모의 손길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 아기를 사랑합니다. 존재 자체로 사랑합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애지중지, 극진히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뭔가 해드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그분은 그냥 존재 자체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야말로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명료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미소 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정하고 겸손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을 즉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이 어딘가 나타나면 즉시 사람들이 뺑 둘러쌌습니다. 연세도 지긋하셔서, 허리도 굽으시고, 주름투성이의 수녀님 얼굴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하느님의 얼굴과 사랑을 봤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한 존재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를 잠시라도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깊은 눈과 마주치며,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다들 수녀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나와 일대일의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은 나와 함께 개인적으로 머물고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함께 앉아 있는 순간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며, 나보다 더 나를 극진히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느님의 본질은 증여(贈與)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결핍 투성이인 우리들에게 무엇 하나 더 주지 못해 안달인 분이십니다. 주다 주다 못해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늘 우리에게 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나라는 존재에 완전 매료되시는 분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푹 빠지시는 분입니다. 나란 존재에 죽고 못 사는 분, 결국 나 때문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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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과 빗물,
또 하나의 아침을 맞습니다.
어느 날은 햇살
어느 날은 비를 맞죠.
저희 단지
그 앞에 “주님!”을 부를 뿐입니다.
주님,
비 내리는 아침을 맞습니다.
당신과 함께...
제 기도가 넋두리여도
축복이 되게 하시는
당신을 믿나이다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