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부활 제4주간 금요일 (2020.5.8.)

honephil 2020. 5. 8. 07:47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산란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 말은 불안이나 공포가 아니라 스트레스와 고통 때문에 생겨나는 부정적 감정을 가리킵니다. 요한 복음의 첫 번째 부분, 곧 전통적으로 ‘표징의 책’이라 불리는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가지의 표징적 사건을 통하여 ‘믿음’의 가치를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믿음’은 개방이고 초월이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도무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열도록 해방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는 것과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이 많다는 사실을 연계하여 가르치십니다. 특정 부류의 사람만이, 특정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누구나가 걸을 수 있는 길이시고, 누구나가 자유로이 함께할 수 있는 진리이시며, 그 누구도 살아 있음의 고귀함으로 초대받았다는 생명 자체로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산란하신 것은 자기 마음의 평온만을 위하여 다른 이의 말과 논리에 무감각한 불신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혼자 듣고 싶은 말씀을 들으려 성당에 가는 사람들, 혼자 만들어 온 세계관이나 신앙관에 매몰되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이들을 불신자라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들, 나아가 자신의 신앙적 색깔을 다른 이의 신앙심 위에 분칠 하는 사람들 ……. 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으시며 산란해하십니다. 그들이 또한 저 자신이라는 사실로, 오늘 저 또한 산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알려 주소서.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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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늘 어버이날을 맞아
당신 사랑과 은총을
교회의 문화예술과 
인문의 바탕에 담으며
거룩한 기쁨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문화원 후원회원 가족의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천상과 지상에서
영원한 시간의 주인이시며
영원한 복락의 주인이신 주님의 
축복과 사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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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어버이날입니다. 꽃들고 다니는 이들이 더러 눈에 띄네요.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준비한 꽃을 받는 마음도 좋겠지만 꽃다발 품에 안고 가는 이를 보는 이도 흐뭇합니다. 꽃 한 송이가 주는 행복감. 며칠 전 한 신학생이 문을 두드립니다. ‘무슨 일이야?’ 불쑥 꽃잎 하나를 내밉니다. 진자주빛 작약 꽃잎입니다. 실은 작약인지 모란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신학교에 서너 그루의 작약(이라고 치고)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소담스런 꽃입니다. 꽃이 진 자리가 섭섭해서 그 앞에 잠깐 있었더니만 그걸 본 모양이지요. 작약 꽃잎을 테이블 유리 밑에 놓아 두었더니 드라이 플라워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영랑의 시 한 구절도 떠올랐습니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봄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 다 물러나고 있습니다. 어버이 날, 숱한 부모들도 다 그렇게 물러난 자리에 우리들이 있겠지요.

아침 먹고 올라왔더니 또 다른 신학생이 문을 두드립니다. 어제 저녁에 둥지에서 떨어진 까치 두 마리를 발견해서 제가 가지고 있던 여분의 새장을 주었더니만 키워보겠노라고 한 친구입니다. 떨어진 충격인지 한 마리는 밤새 죽고 한 마리도 상태가 영 좋지 않다며 울상입니다.(실은 그 친구와 한참 이야기하다 이 글을 쓸 시간을 놓쳐 버렸습니다.) 새벽부터 새끼 잃은 에미 까치가 새장 주위에 와서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대더라면서 자기도 고작 하룻밤 같이 했을 뿐인데 영 마음이 안 좋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어버이날이라 그런지 여러모로 연결되는 일들이 좀 있었네요.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며 남겨질 제자들을 다독이십니다. 누군가는 이 말씀을 듣고 그러더락요. ‘역시 예수님의 아버지는 부동산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는 누구나 갈 수 있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리지 않으시고 오는 모든 이를 다 맞아들이실 준비를 이미 하신 것이죠. 다만 문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하신 주님을 통과하고 모시면서 그 곳으로 갈 발걸음을 떼었는가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마련해놓으신 그 처소에 가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혹 다른 어떤 곳.

며칠 전 읽었던 정채봉님의 시를 올립니다. 아버지 집에도 우리는 가야할 것이고 오늘 같이 깨끗한 하늘을 보여주신 날, 부모님 생각 한번 더 하고 찾아가기에 딱인 날이라서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단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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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10월 30일 일요일 저녁 8시. CBS 라디오 방송에서는 ‘화성인의 습격’이라는 드라마가 한창이었습니다. 댄스음악 프로가 갑자기 중단되고, 화성에서 몇 차례에 걸친 연쇄 폭발이 관측되었으며 이후 몇 개의 유성이 프린스턴과 뉴저지 근방에 떨어져 수백 명이 죽었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다시 댄스음악이 나오다가 아나운서에 의해 갑자기 끊기며 유성으로 보였던 물체는 사실 원형 통이었으며 그 속으로부터 기묘하게 생긴 물체들이 나왔는데 화성인들로 추측되며 그것들이 시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이 드라마는 1시간가량 지속하였는데 분명 여러 번에 걸쳐 가상드라마라는 사실을 밝혔지만, 미국 각지에서는 일대 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청취자가 600만이었는데 그중 무려 1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피란길에 올랐고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람은 각자의 감정을 각자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분들은 크게 반발합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자신에게만 있을 수 없고 외부 상황에 따라 감정이 변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생기는 감정까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도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감정도 자신의 책임입니다. 물론 행복한 감정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감정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니 감정을 책임질 수 있어야 자신 안에 성령을 얼마나 받아들였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옛 순교자들은 사자의 밥이 되어가면서도 기쁨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올바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있다면 그냥 부모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많이 웃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자신의 길을 결정하며 살아야 할 때는 걱정 근심이 많아지면서 웃음을 잃습니다. 우리는 참 아버지 어머니를 둔 자녀들처럼 마음이 다시 편안해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를 빈다!”라고 인사하셨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의 길을 가고 있다면 마음이 평화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있어야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것이기에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면 부모에게 혼이 날까 봐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자녀는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기에 마음이 평화롭고 기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을 따라야만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산에서 길을 잃으면 마음이 불안하지만, 다시 길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때야만 그리스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추구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지께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다른 모든 길은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초조, 두려움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정을 짜보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리스도가 되어 살아봅시다.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리키는 길’을 찾읍시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읍시다. 그러면 결코 마음의 평화를 잃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991년 LA의 한 슈퍼마켓 주인이 10대 흑인 소녀가 오렌지 주스를 훔치려는 줄 알고 그를 잡아끌다가 소녀에게 얼굴을 맞고는 돈을 내려는 소녀를 총으로 살해하여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재산 피해액이 7억 달러에 달하였습니다.

 

      모든 행동 이전에는 반드시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에 집중하지 않으면 행동을 해버리고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길을 찾았다면 분명 마음의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평화롭지 않은 상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분명 실수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먼저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고 그다음에 무언가 해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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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2tjA_WDNI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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