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2020.4.23.)

honephil 2020. 4. 23. 08:00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사도들이 성령 강림 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은, 마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전하는 신문 보도 또는 지울 수 없는 드라마 속 명장면과 같습니다. 최고 의회의 수장 대사제의 질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매우 담대하게 답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베드로 외에 다른 사도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사도의 개념과 범위를 짐작해 보면, 분명 예수님 생전에 줄곧 함께하였던 이들로서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때부터 사도들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한 이들 가운데, 특히 앞서 성전에서 베드로의 첫 기적과 솔로몬 주랑과 최고 의회의 증언 때 침묵 속에 지켜보았던 요한 사도가 함께 있었음은 매우 확실해 보입니다.


대사제 앞의 베드로와 달리 요한 사도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데,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대사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전하는 사도들의 말에 크게 충격받습니다. 이제껏 자신을 포함한 최고 의회의 모든 사제가 하느님을 위해서 증언하였을 때 그 자부심이 대단히 커서, 자신들보다 더 크고 높은 권위와 힘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였는데, 사도들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겠다고 하여, 쉽사리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대사제 앞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들었던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하여 확신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 증언을 믿고 기도하며 실천한다면 하느님을 굳건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믿음에 따른 행동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사회 제도나 결정에 맞서 우리는 얼마나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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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주신 말씀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 3,31-36)

어떤 곳에 가면 뭔가 신성한 분위기가 느껴질 때가 있죠. 자기를 압도하는 그런 분위기나 느낌을 종교학자들은 ‘숭고미’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본당 주일학교 꼬마들과 친해지려고 뒷산으로 소풍을 갑니다. 작은 개울에서 가재도 잡고 수건돌리기도 하고 은박 도시락 열어 김밥도 먹습니다. 김밥에는 역시 칠성 사이다! 놀만큼 놀았겠다 슬슬 내려옵니다. 내려오는 길에 작은 암자에 들릅니다. 나쁠 건 없습니다. 이웃 종교랑 친하게 지내야죠. 오랜만에 절집 마당은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늘 지나치기만 했지 막상 들어온 적은 없는 절집이 아이들은 마냥 신기한 모양이죠. 어마무시한 크기의 범종을 보고 우와, 파르라니 머리 깎은 스님을 보고 또 우와, 납빛 옷자락을 잡아당겨 보고 머리 만져봐도 되냐고 스님께 난감한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대웅전 댓돌 앞에 올라갑니다. 2학년 아녜스입니다. 대웅전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살짝 열린 여닫이 문 사이로 발을 빼꼼하게 들어 들여다 보네요.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금빛 부처님 세 분이 가운데 좌정해 계십니다. 양쪽으론 협시 보살님이 알록달록 채색되어 줄줄이 시립해있죠. 그 광경에 압도된 아녜스는 갑자기 손을 가지런히 모읍니다. 그리고 천천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호를 그었다나 뭐라나요. 저 녀석이 뭘하나 지켜보던 저는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하죠. ‘역시 교리를 잘 가르쳤구만’, 2학년 담당 선생님을 칭찬해 줘야겠다 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스님도 빙그레 웃어 주시죠. 아마도 아녜스는 뭔가 거룩한 느낌을 주는 곳에 가면 저절로 그렇게 손을 모아야하는 것으로 배운 모양입니다.

신학교 대성당은 참 한심합니다. 그저 덩그런 박스형 건물, 딱 농구 연습장 정도로 쓰면 좋겠다 싶은 구조입니다. 우리가 어렵던 시절, 독일 교회의 원조로 지은 그야말로 싸구려 건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는데 저는 속으로 이 성당을 먼저 허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습니다. 미적 감각! 그런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도 없습니다. 숭고미! 그런 것이 있을리 없습니다. 제일 저렴하게 지었음이 분명한, 게다가 바로 아래층에는 식당과 주방이 있어서 영 기도 분위기하고는 무관한 공간이죠. 아무데서나 마음이 문제지 뭐 그리 까다롭냐 하겠지만 어디 사람이 그런가요? 이 무미건조한 성당에서는 여간해서는 마음이 고양되기가 쉽지 않은 건 사실이죠.


그나마 이 성당에서 제일 괜찮은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 전에는 그것도 셀로판지 붙인 것 같은 촌스런 유리였는데 저 신학교 다니던 언젠가 작가님이 봉헌해주신 덕에 어울리지 않는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를 구비하게 되었죠. 뭐 그래봐야 전체 성당 구조가 엉망이라 영 제 맛을 살려내진 못하는 지경이긴 합니다만.


어느 날인가 강론 후 묵상 시간이었을 겁니다. 무심히 제대 위에서 눈을 들어 신학생들 졸고 있나 슬쩍 보는데 그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빛살이 한군데로 모여 한 학생을 환하게 밝히고 있더군요. 유독 그 자리에 집중된 빛. 후광이 빛나듯 그 자리는 신비한 빛의 향연으로 아로새겨졌습니다. 마음이 콩당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태양이 살짝 방향을 틀어버리자  이내 그 빛는 사라졌습니다. 찰나였죠.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한량없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죠. ‘한량없다’, 제한이 없는 성령이시란 뜻이겠죠. 그 한량없으신 성령의 비추심, 영성신학에서 조명이라고 부르는 그 비추심 덕에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 비추심으로 인해 하느님의 아들을 믿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특은도 누리게 됩니다. 신학교 성당은 여전히 기도하기에는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도 달라진 것은 있습니다. 어느 아침 문득 보여주신 그 빛이 갑자기 이 공간을 성령의 현존하심을 알아채도록 해주신 이후로, 가끔 그 빛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두리번거리게 만든다는 것이죠. 오늘은 볼 수 있을까? 어느 시간에 다시 그 빛이 여기를 채워줄까? 묘한 호기심과 두근거림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것,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니’ 이런 방식으로라도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어 내시는 일을 열심히 계속하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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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HFcbFFXxT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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