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성주간 월요일 (2020.4.6.)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성주간 동안 펼쳐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극적인 사건들에 하루하루 동참하는 가운데,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닥쳐올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우리가 죄에서 구원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베타니아에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는 아름다우면서 슬픈 예감의 이야기를 묵상하게 됩니다.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는 감사와 우정의 선물로 식사를 마련합니다. 특별히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바릅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척 자선을 내세우지만 감출 수 없는 탐욕으로 비열한 속내를 드러내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소름 돋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이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놓으시려는 예수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향유는 거룩하신 분의 죽음을 준비하는 도유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도유의 궁극적 의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에게 그분께서 부어 주시는 영’ 곧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의 탐욕은 생명의 소중함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탐욕에 빠지면 성령을 간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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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성주간 월요일
<부부의 관계는 그 부부의 부모와의 관계의 연속이다>
복음: 요한 12,1-11
지구는 인간의 절제되지 못한 생활방식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5년 전 세계 대표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섭씨 2도 내로 기후를 안정시키자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이 협약으로부터 탈퇴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자신은 미국의 대통령이지 전 세계의 대통령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참으로 미국을 사랑하는 대통령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그냥 느낌만으로 말하자면, 왠지 재선을 위한 자신만의 이익을 목적으로 미국인들을 이용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더 큰 무엇을 사랑하지 못하면 더 작은 것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란 확신 때문입니다. 태양이 자신이 빛을 줄 대상을 고려하며 뜨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대상을 가릴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대통령은 제 나라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자녀가 누군가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 그 자녀의 배우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술을 잔뜩 먹여보고 주사가 있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건실하게 살아왔는지를 조사할 것입니다. 만약 저라면 그 사람이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볼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하는 모습이 결국은 결혼하여 나의 자녀에게 하게 될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갈 사랑까지 나의 자녀에게 쏟을 사람이 있을까요? 부모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누구도 사랑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일 것입니다. 부모만큼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가져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 발을 닦아드립니다. 3백 데나리온이면 약 3천만 원 정도 하는 향유입니다. 이것을 본 가리옷 유다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렇게 충고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만약 누군가 성당에서 어느 액수의 돈을 봉헌할 때, “성당에 내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주는 게 낫다.”라고 말한다면 참 이웃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보일까요? 이는 부모에게 줄 것을 차라리 자녀들에게 주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신 분께 아깝다면 이웃에게도 아까운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짐짓 이웃사랑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려 했던 가리옷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생각한다고 하느님께 아까워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에게 대한 사랑이 없다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여름에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더워서인지 아무도 그 사고에 관심이 없었고 빨리 사고가 처리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도 내려서 길 위에 떨어진 사고 잔해를 치우고 차 안에 다친 운전자를 보기는 했지만 전화로 신고만 하고 그냥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나의 부모님이었다면? 만약 나의 형제였다면?’
그렇게 보였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정 없이 배우자와 함께 살다가 나이가 들어 자신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할까요? 부모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 부모에 대한 연민과 겹치면서 배우자가 다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배우자가 더 미워질 것입니다.
먼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해 준 사람입니다. 먼저 그 사랑을 이뤄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하늘을 사랑할 수 없으면 땅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할 수 없으면 자신의 나라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할 수 없으면 자신의 가족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고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생명까지 주신 그리스도께 무언가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 아까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사랑으로 줄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