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20.3.20.)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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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호세아의 외침은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살게 하시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강복하시는 모습은 백성들에게 화해하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게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호소에 백성들은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 숭배를 일컫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큰 계명 안에서도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 또는 황금률로도 불리는 이 계명은 단순합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 계명은 구약 성경의 요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무엇이든 다른 것이 놓인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더욱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처럼 들리지만 실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실천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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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사순 제3주간 금요일
<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평생을 인간의 욕구에 대해 연구한 애이브럼 #매슬로우는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밑의 1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는 등의 생존을 위한 욕구가 자리합니다. 그다음도 이와 비슷한 생존 욕구인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리와 지위를 차지하려 하는 ‘안전욕구’입니다. 제3단계도 생존 욕구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공동체, 사회에 소속되어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기 위한 ‘소속과 애정 욕구’입니다. 4단계도 이와 비슷한데 애정을 넘어 인정받으려는 ‘존경 욕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1단계가 해결되어야 2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단계의 안전욕구와 3단계의 애정욕구에 관한 실험 중에 ‘#프라이팬 모성애’ 실험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한 고문으로 점점 온도가 높아지는 바닥에서 결국 엄마는 아기를 밟고 올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을 일본도 했는데 731부대의 ‘물통 모성애’ 고문이라고 합니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결국 엄마가 아기를 밟고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인간적은 행위를 통해 얻어 낸 결론이 인간은 생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사랑의 욕구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슬로우는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매슬로우가 말하는 망치는 바로 욕구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가 자신을 지배하게 되고 이성도 그 욕구에 따라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망치를 내려놓으면 생각도 바뀝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사람들은 ‘망치로 어떤 못을 때릴까?’라는 생각만 하면서도 깊은 숙고를 하는 사람이라 착각합니다. 망치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은 자신을 살리려고 이웃을 이용하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다가 자신도 망치에 맞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망치를 쥐고 태어나는데 그것이 #생존욕구입니다. 생존 욕구는 이웃을 죽이는 욕구입니다. 동물들은 타자의 생명을 먹으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생존 욕구가 인간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생존 욕구가 지배하면 항상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힘으로 이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절대 인간의 힘만으로는 생존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고 생각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은 욕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따르는 생각이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욕구를 먼저 변화시키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다가는 사람 흉내 내는 원숭이가 됩니다. 욕구는 원숭이인데 행동만 사람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지배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욕구는 ‘#자기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이 욕구를 바꾸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갖고 나서는 자식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혹은 1년을 더 살거나, 지금 죽고 5억을 선택하거나 하라고 할 때, 아이들은 하나같이 1년을 더 살기를 선택하지만,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1년을 더 사느니 자녀들을 위해 지금 죽어 5억을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랑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은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요? 자기 정체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자기 정체성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늑대로부터 그 정체성을 받아 자신이 늑대인 줄 압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이 그 아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채워질 때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로부터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물려받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에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은 곧 인간의 ‘본성’이 됩니다. 본성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이 믿음은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게 만듭니다. 인간은 남을 심판하고,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더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자신들의 인간인 부모에게서 받는 본성입니다. 자신을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여전히 망치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시어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믿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 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망치를 내려놓고 마치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멍에로 맨 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본성, 하느님의 욕구에 지배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멍에는 그분의 욕구입니다. 그분의 욕구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욕구에 지배받으면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명의 역할입니다.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개로만 나뉩니다. 계명은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지는 멍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도구로 삼으셔서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소’입니다. 소는 주인의 멍에에 가하는 힘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소가 망치를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될 때야만 그 지겹던 이웃을 심판하던 망치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왜 이 계명들을 가지고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따르려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새로운 망치를 만들어 자신도 그러면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망치를 쥐여준 장본인은 ‘자아’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멍에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고서는 나에게서 실현될 수 없는 욕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사람의 자녀라는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해 봐야 망치로 계속 사람을 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망치를 쥐고 태어나 원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매슬로우가 불가능하게만 여겼던 그 다양한 망치들을 내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어 나를 죽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욕구를 실현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한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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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 12,28ㄴ-34)
모든 계명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이냐는 어느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말씀해 주십니다.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내용이지만 당신의 입을 통해 들려졌을 때 이 말씀은 더없이 귀한 삶의 지표가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주님의 이 답변이 율법 학자 한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는 것이지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에서 율법학자는 유대의 전통과 습속에 정통한 이들입니다. 소위 전문가이지요. 율법 해석의 자격을 갖춘 해박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 전문가가 신출내기에다 출신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이에게 진리에 관한 자문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파격적인 일입니다.
전문가이기에 그는 자기 영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영역에 있어서는, 이 사안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는 자신이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예수께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되었을뿐더러, 그랬을 경우 그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신분이 가진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관한 추구가 있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위와 상관없이, 신분과 상관없이 배울 점이 있는 이에게는 배울 수 있다는 겸손한 어느 율법학자로 인해 우리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질문 속에 이미 답이 있다고 하지 않나요. 아이가 말문이 트이고 세상에 대해 배워 나갈 때는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귀찮을 정도로 말이죠. ‘엄마, 이게 뭐야?’를 입에 달고 삽니다. 모든 것이 다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멈춥니다.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에게 질문하는 친구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물론 그 친구가 늘 쉬는 시간 직전 수업이 마쳐질 때 질문해서 수업이 끝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질문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그런 분위기.
질문을 통해 우리는 답도 찾지만 또 내가 뭘 모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죠. 정말인가, 진짜인가, 실제로 그런가? 묻고 묻다 보면 길이 보입니다. 할 일이 눈에 들어옵니다. 더 명확히 알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에게라도 묻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죠. 철 모르는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늘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내가 다 알지 않고 그가 더 알고 있을 수 있음에 열려 있는 이, 그는 오늘도 묻습니다. 그래서 기어이 더 잘 알고 나서게 되겠지요. 우리 기도도 주님께 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생각하는 이것이 맞습니까? 혹시 다른 길, 다른 방법, 다른 선택이 있지는 않은지요-하고 말입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코로나 19' 감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 해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과함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
정상 연합회 기도문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인준
#코로나 19 극복 기도